번역과 나 42

[번역 일기] 20220605 바다 환경 전문 출판사를 세우고 환경운동을 하면서 내게 생긴 변화

예전에 저는 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사상이 부족해서, 혹은 모두를 설득시킬 만한 사상이 완성돼 있지 않아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세계적인 사상을 낳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매일매일 저를 채찍질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길은 걸을수록 저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책을 계속 읽는데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만 더 눈에 들어오고, 외국어를 두 개나 할 수 있게 됐는데도 할 수 있게 된 말보다 못 하는 말 때문에 답답해했죠.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기쁘기보다 경쟁심이 먼저 들었고, 그러면서 모순적이게도 저와 뜻이 맞는 사람이 없다며 지독하게 외로워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문제가 제가 공부를 더 하고 더 높은 학위를 따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세계적인 사상가가 ..

[번역 이야기] 30. 선배 번역가 탐구 1탄 - 한국 번역사의 시조始祖, 서재필

지금 조선에 제일 급선무는 교육인데, 교육을 시키려면 남의 나라 글과 말을 배운 후에 학문을 가르쳐야 하거늘 교육할 사람이 몇이 못 될지라.그런고로 각종 학문 책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가르쳐야 남녀와 빈부가 다 조금씩이라도 학문을 배울 것이니, 한문을 배워 가지고 한문으로 다른 학문을 배우려 하면 이십여 년이 지나도 그 나랏말 할 사람이 그중에 몇이 못 될지라. - 서재필, 『독립신문』 제2권 제92호, 1897.8.5 - 한국에서 번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지금이야 매년 출간되는 책 다섯 권 중 한 권이 번역서일 정도로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서 번역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번역이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지금처럼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예전에는 엘리트들이 한문을 그대로 가져..

[번역 이야기] 29. 번역은 어째서 이렇게 재미있을까? (ft. 칙센트미하이와 Flow 이론)

와, 여러분. 도대체 번역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까요? 저는 전업 번역가가 되어 매일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만, 직업적으로 매일 반복하는 일이라 지겨워질 법한데도 이상하게 하루하루 번역을 하는 것이 점점 더 즐겁습니다. 음악도 따로 듣지 않고 골방에 혼자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며 타자를 열심히 두드리는 게 전부인 일인데, 어떤 텍스트를 번역하더라도 장르에 무관하게 번역은 일단 그 자체로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왜 예전에는 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학자의 길을 걷는 것만 고집했을까 싶습니다. 번역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번역가의 직업 만족도가 전반적으로 매우 높은 편이라는 것을 보면 다른 번역가들도 번역을 굉장히 즐기는 것 같..

[번역 이야기] 28. 빌 에반스, 그리고 지난한 데뷔의 강을 건너는 번역가 지망생의 자세

요즘엔 주변 사람들에게 제 직업을 소개할 때 애매한 점이 많습니다. 아직 역서가 없고 데뷔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 자신을 '번역가'라고 지칭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고, 그렇다고 괜히 '번역가 지망생'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무슨 책을 번역했느냐"라는 질문을 들으면 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데, 한편으론 검토서 작성처럼 번역 에이전시에서 꾸준히 일감을 받아서 일을 하고 있고, 에이전시에서도 저를 '번역가님'이라고 불러주고 있으니 번역가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가 요즘 제가 내린 나름의 타협안은 저 자신을 "소속사는 있지만 데뷔를 못 한 아이돌 연습생 같은 신분"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TV에는 안 나오지만 지방 행사를 열심..

[번역 이야기] 27. 나쁜 번역 하는 법을 배워보자! ③ (작품성을 중심으로)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ssjstudylog.tistory.com/100 [번역 이야기] 26. 나쁜 번역 하는 법을 배워보자! ② (가독성을 중심으로)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ssjstudylog.tistory.com/99 [번역 이야기] 25. 나쁜 번역 하는 법을 배워보자! ① - 정확성/충실성/성실성을 중심으로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번역을 ssjstudylog.tistory.com 본 포스트는 『영미영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 창비, 2005)에서 나쁜 번역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 문장들을 주제별로 모아 정리하고 있습니다. 좋은 번역을 할 줄 알려면 나쁜 번역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겠죠? 이전 포스트에 이어, 이번..

[번역 이야기] 26. 나쁜 번역 하는 법을 배워보자! ② (가독성을 중심으로)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ssjstudylog.tistory.com/99 [번역 이야기] 25. 나쁜 번역 하는 법을 배워보자! ① - 정확성/충실성/성실성을 중심으로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번역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정말 다양한 이론과 관점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번역이 원본을 똑같이 모사하는 행위라고 본다면 얼마만큼 원 ssjstudylog.tistory.com 본 포스트는 『영미영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 창비, 2005)에서 나쁜 번역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 문장들을 주제별로 모아 정리하고 있습니다. 좋은 번역을 할 줄 알려면 나쁜 번역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겠죠? 이전 포스트에 이어, 이번에도 나쁜 번역 하는 법을 열심히 배..

[번역 이야기] 25. 나쁜 번역 하는 법을 배워보자! ① (정확성/충실성/성실성을 중심으로)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번역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정말 다양한 이론과 관점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번역이 원본을 똑같이 모사하는 행위라고 본다면 얼마만큼 원본을 똑같이 재현해내느냐에 따라 좋은 번역인지 아닌지가 판별될 수 있습니다. 번역이 하나의 세계를 다른 세계에 소개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두 세계의 접점에서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느냐, 이를테면 도착어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확장시킬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수 있지요. 그런가하면 번역을 비주류 문화가 주류 문화를 거울삼아 자신의 문화적 자신감이나 우월성을 확립하는 행위일 때는 번안에 가까운 창작적 번역이 더 우대받기도 합니다. 포스트식민주의 번역에서 보는 좋은 번역의 기준이 다르고, 페미니즘 번역에서 보는 좋은 번역의 기..

[번역 이야기] 24. "번역본을 읽을 바엔 원서를 읽겠다구요?" ②

(앞선 글에서 이어집니다) [번역 이야기] 23. "번역본을 읽을 바엔 원서를 읽겠다구요?" ① 얼마 전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걸어 제가 번역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고맙게도 친구가 이런 제 소식을 굉장히 반기더라구요. 다독을 하기로 유명한 친구여서 서로 번역에 관한 ssjstudylog.tistory.com 앞선 포스트에서 "번역서를 읽느니 원서를 읽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심리에는 첫 번째로 "더 좋은 번역을 해주길 바란다"라는 권면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무언가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번역가에게 번역본을 읽지 않겠다고 말하다니요! 그러면 다시 한번 벨로스의 「번역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이라는 글로 돌아가 보..

[번역 이야기] 23. "번역본을 읽을 바엔 원서를 읽겠다구요?" ①

얼마 전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걸어 제가 번역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고맙게도 친구가 이런 제 소식을 굉장히 반기더라구요. 다독을 하기로 유명한 친구여서 서로 번역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제 블로그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번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번역 일 하는 사람한테 뭔가 미안한 말이지만, 중간에 번역이 끼면 말 그 자체의 느낌이 안 산다고 생각해서 원서로 읽을 수 있는 책은 원서로 읽으려고" 이 말을 듣고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친구는 어떠한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원문에 밀착된 좋은 번역을 많이 해달라는 권면의 의도로 남긴 말이었을까요? 그런데 '미안하다'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말을 듣고 번역가..

[번역 이야기] 22. 글 잘 쓰는 번역가가 되려면 - 블로그 포스팅을 위한 조언 (혹은 다짐) ②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번역 이야기] 21. 글 쓰는 번역가가 되려면 - 블로그 포스팅을 위한 조언 ① 번역을 잘하려면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외국어 실력이고, 다른 하나는 배경 지식,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한국어 실력입니다. 흔히들 외국어 실력이 가장 중요하지 ssjstudylog.tistory.com 하지만 일단 글을 쓰는 것이 글을 잘 쓰는 것보다 먼저라고 하더라도 순백의 문서 작성 화면이 주는 압박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글'인데 신변잡기식 일기나 메모처럼 쓰는 것은 어쩐지 성에 차지 않고 글쓰기 연습에도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이번에도 같은 책, 『문장의 일』에서 찾아볼 수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