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29. 번역은 어째서 이렇게 재미있을까? (ft. 칙센트미하이와 Flow 이론)

서서재 2021. 7. 30. 09:40

와, 여러분. 도대체 번역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까요? 저는 전업 번역가가 되어 매일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만, 직업적으로 매일 반복하는 일이라 지겨워질 법한데도 이상하게 하루하루 번역을 하는 것이 점점 더 즐겁습니다. 음악도 따로 듣지 않고 골방에 혼자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며 타자를 열심히 두드리는 게 전부인 일인데, 어떤 텍스트를 번역하더라도 장르에 무관하게 번역은 일단 그 자체로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왜 예전에는 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학자의 길을 걷는 것만 고집했을까 싶습니다. 

 

번역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번역가의 직업 만족도가 전반적으로 매우 높은 편이라는 것을 보면 다른 번역가들도 번역을 굉장히 즐기는 것 같거든요. 번역가들의 수기집을 보면 번역일을 자신의 '천직'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을 정말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고, 현역 번역가의 에세이집 중에는 아예  『번역의 즐거움』 (유지훈, 2010)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노경아 번역가는 사무실에서 너무 열중해서 재미있게 번역을 한 나머지, 다른 직원이 '혹시 지금 게임하느냐'라고 물을 정도였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노경아 외, 『도서 번역가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p.35)

 

그렇다면 번역은 도대체 왜 이렇게 재미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번역가마다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가 잔뜩 꼬아놓은 문장을 이해해서 깔끔한 한국어 문장으로 재탄생 시켰을 때 짜릿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도저히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번역어를 찾았을 때의 쾌감이 번역을 즐기게 하는 요인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습니다. 출판 번역가의 경우에는 자신의 이름이 표지에 적힌 책이 나왔을 때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겠구요. 번역가가 열 사람이라면 열 명이 이야기하는 이유가 저마다 다 다를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여러 번역가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어보는 대신 번역이 재미있는 다양한 이유들 속에 공통적으로 어떤 요소가 들어있는지 탐구해보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번역이 주는 즐거움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파헤쳐보려는 것이지요. 

 

혹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라는 심리학자를 들어보셨나요? 행복에 관해 연구하기로 유명한 학자인데, 칙센트미하이가 쓴 책 중에 『플로우Flow』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여러 가지 활동을 관찰합니다. 암벽 등반이나 테니스, 체스, 소설 읽기, 십자말 풀이 등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기에는 활동을 하는 동안 완전한 몰입이 이루어져서 자의식이나 걱정, 시간 개념이 사라지고 상당한 만족감이 남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렇게 의식이 한 곳에 집중되어 질서정연하게 한 방향으로 흐르는 상태를 '플로우Flow'라고 이름붙입니다. 

 

플로우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곧 이때의 경험 자체가 매우 즐겁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어지간한 고생도 감내하면서 그 행위를 하게 되는 상태이다. (p. 29) 흔히 우리는 플로우를 경험할 때 집중의 정도가 매우 높아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고 걱정도 사라진다. 또한 그 순간에는 자의식이 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플로우를 유발하는 활동은 너무나 만족스럽기 때문에, 스스로 그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p. 140)

 

그렇다면 이러한 플로우 상태는 어떻게 도달하게 되는 것일까요? 칙센트미하이는 플로우 상태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한 끝에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될 시 플로우를 경험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최적 경험[플로우]을 설명하기 위해 작곡 · 암벽 등반 · 춤 · 요트 타기 · 체스 등과 같은 활동을 예로 들었다. 이러한 활동이 플로우를 유발시키는 이유는 이 활동 자체가 최적 경험에 더 쉽게 도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활동에는 규칙이 있고, 이 규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습득해야 하며, 목표가 분명하고, 피드백을 제공하며, 또한 통제가 가능하다. 이런 활동을 할 때는 일상 생활의 경험과 확연히 구별되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 활동에 집중하고 개입할 수 있다. 운동 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선수들은 눈에 띄는 색다른 유니폼을 입는데, 이 순간 일시적으로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특별한 세계에 빠져든다. 운동 경기라는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선수들과 관중 모두는 현실의 세계 대신에 '경기'라는 색다른 현실에 집중한다. (142)

 

정리하면, 플로우에 쉽게 도달하는 활동들은 ① 규칙과 분명한 목표와 피드백이 존재하고, ② 규칙 수행과 목표 달성을 위해 적절한 기술/능력을 습득할 것이 요구됩니다. 우선 ①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플로우 활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명확한 목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암벽 등반은 고지에 오른다는 목표가 있고, 체스는 상대편 왕을 잡는다는 목표가 있죠. 축구에는 골을 넣는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하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할 때 우리는 플로우를 더 쉽게 경험하게 됩니다. 

 

번역에도 명확한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원문의 의미를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우리말 문장으로 새로 쓴다는 목표이지요. 암벽 등반을 하는 사람이 열심히 손과 발을 움직여서 정상까지 올라 깃발을 꽂는 것처럼, 번역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적절한 번역어를 찾아내 단어를 배열하고 문장의 말미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원문의 표현에 딱 맞아 떨어지는 번역어를 찾았을 때 번역가는 목표를 이뤘다는 성취감을 얻죠. 

 

이렇게 명확한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플로우 활동들에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규칙도 마련된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편 왕을 잡음으로써 게임이 끝나는 체스는 여러가지 말의 움직임이 정해져있습니다. 농구에도 공을 잡고 워킹(더블 드리블)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매번 머리 아프게 탐색할 필요 없이 정해진 규칙을 잘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플로우 활동의 두 번째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번역에는 규칙이 없는 게 아니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논쟁을 비롯해서 숱하게 논란이 되는 번역의 문제들을 살펴보면 번역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번역에도 기본적인 규칙은 존재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올바른 번역의 지침을 담고 있는 『실전 영어 번역의 기술』(서계인, 2004)의 목차를 살펴볼까요? 

 

대명사를 남용하지 마라 / 맞춤법과 띄어쓰기, 외래어 표기법을 잘 지켜라 / 등장인물의 이름을 통일하라 / 행갈이와 삽입구 처리 방법 / 원문의 품사에 얽매이지 마라 / 역문의 자수를 한 자라도 줄여라 / 쉬운 말로 번역하라 / 번역문에 논리적 모순이 없게 하라 /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해야 한다 / 목적어와 서술어가 호응해야 한다 / 수식어와 피수식어가 호응해야 한다 / '의'를 남용하지 마라 / 관형사형 어미를 남용하지 마라 / 자동사 피동형과 이중 피동형을 삼가라 / 이중 사동형을 삼가라 / 어순을 매끄럽게 정리하라 / 간결하게 표현하라 / 무생물 주어 구문(물주 구문)의 번역은 이렇게 하라 / 형용사를 부사로 바꿔서 번역해 보라

 

번역가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들도 들어있습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해야 바로 쓴다』(한효석, 2000)의 목차입니다. 

 

홀로 쓸 수 없는 말 / 지시어 줄이기 / 말버릇을 글로 쓰지 않기 / 복수접미사 '-들' 바로 쓰기 / 숫자 바로 쓰기 / '의' 줄이기 / 조사(토씨) 바로 쓰기 / '을/를' 바로 쓰기 / 객관적인 단어로 바꾸기 / 어휘, 용어를 정확히 쓰기 / 문장을 짧게 쓰기 / 문장 끝을 짧게 하기 / 수식어를 피수식어 가까이 붙여 놓기 / 구조어 바로 쓰기 / '것' 줄이기 / 명사문 줄이기 / 주어, 목적어, 서술어 호응시키기 / 주어와 목적어를 서술어 가까이 붙여 놓기 / 구체적으로 쓰기 / 부풀리지 않기 / 번역체 문장 버리기 / 관형절 줄이기 / 명사절 없애기 / 평서문으로 쓰기 / 문장 부호 바로 쓰기

 

이 규칙들이 항상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러한 규칙들을 잘 지키면 깔끔하고 좋은 문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축구에는 규칙이 엄청나게 많지만, 그것들을 활용해서 무수히 많은 경기 패턴이 나오고 게임의 재미가 배가되는 것처럼, 번역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규칙들 속에서 다양한 번역문이 만들어지며 번역가에게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칙센트미하이는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이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규칙 중 하나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기본적이라 할 수 있는 규칙들은 단어의 사용을 통제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단어들은 다양한 복합성의 수준에서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분명한 예가 되는 것이 십자말 풀이 게임이다. 이 게임은 (...) 게임을 풀고 나면 질서가 잡히는 느낌 속에서 만족스러운 성취감을 갖게 해준다. (p.239)

 

이번 포스트에서 살펴볼 플로우 활동의 마지막 특징은 바로 '즉각적인 피드백'의 존재할 때 플로우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테니스를 치는 사람은 볼을 한 번 칠 때마다 자신이 볼을 잘 쳐냈는지 곧바로 알게됩니다. 볼은 상대 선수의 사각지대에 정확히 꽂힐 수도 있고, 네트에 걸릴 수도 있고, 라인을 넘어갈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매 순간순간의 피드백을 구성하는 것이지요. 정해진 규칙에 따라 명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금방금방 목표달성에 관한 피드백이 주어진다면 지루할 틈이 없을 것입니다. 

 

번역가는 하나의 표현을 적절히 번역할 때마다, 하나의 문장을 잘 완결지을 때마다 피드백을 얻습니다. 골프 선수가 공을 쳐내고 나서 홀 컵에 얼마만큼 가깝게 공이 도달했는지를 확인하듯, 번역가는 번역어를 생각해내고 나면 얼마나 원문의 근사치에 다다랐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한번에 홀인원을 하는 것처럼 그야말로 찰떡같이 들어맞는 번역어를 찾아낼 때도 있지요. 원문에 들어 있는 표현들을 누락하지 않고 하나의 좋은 한국어 문장으로 완성해 마침표를 찍는 것도 좋은 피드백이 됩니다. 그러니까 번역가는 단순히 책이 출판되었을 때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만을 보고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번역 작업의 순간순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작업 행위들에서도 쾌감을 얻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번역이 재미난 이유는 명확한 규칙이 존재하고, 분명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즉각적인 피드백이 제공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평소에 하시는 활동 중에도 이렇게 플로우를 경험하게 해주는 활동이 있나요? 만약에 잘 모르시겠다면, 위의 기준을 충족하는 활동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번역이 보기와는 다르게 단순하고 규칙적인 면이 있는 것처럼, 예상외로 다른 활동 중에도 컴퓨터 게임처럼 빠져들 수 있는 활동이 있을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