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28. 빌 에반스, 그리고 지난한 데뷔의 강을 건너는 번역가 지망생의 자세

서서재 2021. 7. 27. 08:35

요즘엔 주변 사람들에게 제 직업을 소개할 때 애매한 점이 많습니다. 아직 역서가 없고 데뷔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 자신을 '번역가'라고 지칭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고, 그렇다고 괜히 '번역가 지망생'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무슨 책을 번역했느냐"라는 질문을 들으면 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데, 한편으론 검토서 작성처럼 번역 에이전시에서 꾸준히 일감을 받아서 일을 하고 있고, 에이전시에서도 저를 '번역가님'이라고 불러주고 있으니 번역가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가 요즘 제가 내린 나름의 타협안은 저 자신을 "소속사는 있지만 데뷔를 못 한 아이돌 연습생 같은 신분"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TV에는 안 나오지만 지방 행사를 열심히 뛰면서 실력을 쌓고 있는 중'이라고 부연 설명을 덧붙이면서요..ㅋㅋ

 

과연 언제쯤 저는 정식 번역가로 데뷔해서 떳떳하게 저 자신을 '번역가'로 소개할 수 있을까요?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4개월 정도 되어가지만, 아직 책 번역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샘플 번역에는 한 건밖에 참여하지 못했고, 언제쯤 제 이름이 걸린 역서를 낼 수 있을지 막연하기만 합니다. 적어도 역서가 나와야 취준생들이 "나 취업했어!"라고 외치듯 "나 역서 나왔어!"라고 자랑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번역가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역서가 한 권 나왔다고 해서 회사에 취직한 사람처럼 안심해선 안 될지도 모릅니다. 취직은 한 번 성공하면 별 탈이 없는 이상 계속 월급이 나오지만 번역가는 계속해서 새로운 번역 일감을 수주해야기 때문이죠. "데뷔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바닥에서 버티는 것"이라는 선배들의 조언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겁니다. 책 한두 권만 번역하고 이슬처럼 사라져버리는 번역가들도 많다고 하니까요... 

 

그렇다면 '언제 데뷔를 할 수 있는가'하고 조바심을 내는 것보다 '데뷔해서 버틸 실력이 되었는가'하고 자문하는 것이 훨씬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서계인 번역가는 "출판사들은 특히 신인 번역가들에게 인색하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신인이기에 현역의 평균 수준을 넘는 실력을 갖추어야만 하는 건지도 모른다. (『실전 영어 번역의 기술』, p.14)"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참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실정이 그렇다면 빨리 데뷔를 하려고 조바심을 낼 게 아니라 제대로 현역 번역가 선배들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될 때까지 데뷔를 오히려 늦춰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우열 번역가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전에는 데뷔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만 되면 최대한 빨리 일을 맡아서 실전을 경험하며 실력을 쌓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지요. (...)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 제 주변의 번역가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번역가로 데뷔하고 나서 실전 경험을 쌓으며 번역 실력을 기르겠다는 것이 안일한 발상"이라는 점을 알았지요. 막상 데뷔하고 나면 일정을 맞추기에도 바빠서 허덕이기가 일쑤기 때문에 따로 짬을 내어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출내기면서 마감을 마냥 여유 있게 달라고 하기도 어려운 노릇이고요. 그러다 보면 연습할 때만큼도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집니다. 오역도 더 많아지고 어색한 표현도 그만큼 늘어납니다. (...) 이미 데뷔해서 역서는 생겼는데 번역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 늘 불안하다면 과연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릴 수 있을까요? (...) 실력이 애매한 상태에서 번역가로 데뷔하고 나면 이런 부분이 어려운 문제가 되지요. 이런저런 면을 고려할 때 저는 딱 데뷔할 정도의 실력으로 일을 시작하기보다는 좀 더 넉넉하게 토대를 다진 뒤 일을 시작하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적어도 처음에 정신없이 일하는 기간에는, 자기 실력을 인정받을 때까지는 실력을 걱정하기보다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김우열, 『나도 번역 한번 해 볼까?』, p158)

 

요약을 하자면 '일하면서 실력을 쌓기가 쉽지 않으니, 자기 실력에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는 계속 수습 기간을 가져야 한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윤영삼 번역가는 "장차 번역가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2~3년은 길지 않은 시간(『갈등하는 번역』, p.31)"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수습 기간을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거쳐야 실력 있는 번역가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기초가 부실해서 한두 페이지마다 오역을 몇 개씩 남기는 번역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몇 페이지를 넘겨봐도 오역이 단 한 개도 없는 믿음직한 번역가가 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몇 년 동안 수련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으려면 남다른 자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데뷔를 준비하면서 실력을 쌓는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겠지요. 재즈의 거장 빌 에반스도 연습과 훈련의 과정을 즐기는 것이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합니다. 다만 그는 과정을 즐기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데요, 그것이 무엇인지 오랜만에 영상과 함께 확인해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H8Y8vAz2Q

우리가 어렸을 때 같이 연주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네가 연주하면서 음악에 푹 빠져들고 계속 신나있던 모습이 기억이 나. 요컨대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하길 원하지만, 몇 년 동안 더 준비되고 그 분야를 탐구하는 과정을 잊어버리고 성공을 바라는 게 사실이지. 어떤 분야에서건 말이야. 사업을 하든, 의사가 되려 하든, 변호사가 되려 하든... 그 분야에 깊이 빠져들면서 느끼는 감정과 고유한 가치들은 간과하고 그 결과만 보는 거지

무슨 말인지 정말 이해해. 나에게도 종종 조언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도 같은 문제점을 보곤 하지. '제가 이걸 계속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묻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진전을 이루기 힘들어하는데, 그들은 매 단계마다 이루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정확하게 수행해야만 해.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고 진실된 마음으로 현실적인 목표를 정확하게 수행해야 하지. 그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문제를 작은 부분으로 쪼개서 해결하는 대신 상황을 뭉뚱그려서 하나의 커다란 문제로만 해결하려고 해. 내 생각엔 어떤 레벨에서든지 이런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 정확하게,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서,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것 말이야. 한 번에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 모든 문제를 가져와서 이것을 하나의 큰 문제로 만들면 무언가 잡히는 것 같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더욱 혼란스러워져서 함정에 빠지게 될 뿐이지. 무언가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모두 현실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어. 초기에는 문제가 클 수밖에 없기에 그것을 단계별로 나눠야 해. 그리고는 단계별로 배우는 순간들을 즐기는 거지.

 

이 영상에서 빌 에반스는 '성공이라는 크고 모호한 목적지까지 한 번에 훌쩍 건너갈 수 있기를 바라기보다 목표를 잘게 나누어 차근차근 한 계단씩 밟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성장의 과정을 즐기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분석적 접근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 분야에 깊이 빠져들면서 느끼는 감정과 고유한 가치들'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네요. 그러니 번역가 지망생으로서, 우리는 성급하게 데뷔를 하려고 조급해하기 보다는 차근차근 실력을 쌓으면서 그 과정을 즐기는 데에 집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데뷔하기까지 어떤 실력을 길러야 하는지 한번 목록을 만들어서 기간을 정해놓고 하나씩 달성해나가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우선 『안정효의 오역 사전』을 아침마다 다섯 페이지씩 읽고 정리하면서 대화문 번역에 대한 감을 익히는 것을 올해 하반기 목표로 세워보았는데, 이 작업이 완료되면 내년 상반기에는 영어 성경이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을 교양있는 작가라고 생각할수록 글 속에 성경 구절이나 셰익스피어가 쓴 대사들을 숨겨놓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이걸 파악하는 눈이 뜨이지 않았다 보니 계속 이런 비유와 상징을 놓치게 되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Practical English Usage도 이전에 통독을 시도하다가 중간에 흐지부지되어 버렸는데, 조만간 마저 남은 부분을 읽고 싶습니다. 시간이 되면 한겨레 번역 아카데미도 다니고 싶네요. 바른번역 글밥아카데미에서 하는 소설 번역 강의를 아직 듣지 못했는데, 이것도 들어봐야 합니다. 현대 소설 번역을 할 줄 알려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영어로 소설을 읽어나가야겠네요. 아, 그리고 언젠가는 독일어 번역도 하고 싶기 때문에 독일어 공부도 재개해야겠습니다. 휴, 이렇게 써놓고 보니 2~3년이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쪼록 여러분, 우리 모두 너무 성급하게 데뷔하려고 생각하기보다는 좋은 번역가가 되는 데에 집중해보도록 합시다! 번역만큼 재미있는 것도 또 없으니, 그 과정이 힘들지만은 않을 거예요.

 

좋은 번역가가 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 번역할 우리 모두에게 무운을 빌며, 이만 오늘 포스트를 마칩니다.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