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30. 선배 번역가 탐구 1탄 - 한국 번역사의 시조始祖, 서재필

서서재 2021. 8. 9. 17:28

 

지금 조선에 제일 급선무는 교육인데, 교육을 시키려면 남의 나라 글과 말을 배운 후에 학문을 가르쳐야 하거늘 교육할 사람이 몇이 못 될지라.그런고로 각종 학문 책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가르쳐야 남녀와 빈부가 다 조금씩이라도 학문을 배울 것이니, 한문을 배워 가지고 한문으로 다른 학문을 배우려 하면 이십여 년이 지나도 그 나랏말 할 사람이 그중에 몇이 못 될지라.
- 서재필, 『독립신문』 제2권 제92호, 1897.8.5 -

한국에서 번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지금이야 매년 출간되는 책 다섯 권 중 한 권이 번역서일 정도로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서 번역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번역이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지금처럼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예전에는 엘리트들이 한문을 그대로 가져다 읽었으므로 딱히 번역할 일이 없었지요. 아니, 당시에는 외국의 글을 담아낼 수 있는 우리 문자조차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번역의 시작은 적어도 한글 창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훈민정음 언해본』이 한문으로 쓰인 『해례본』의 번역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한글은 그 시작부터 번역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의 번역사는 한글 창제라는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하지만 아쉽게도 한글은 초창기에 언문으로 천대받았던 탓에 아주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외국의 글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도 지지부진했지요. 엘리트들은 지식과 문자를 독점하고 싶어 했고, 외국의 글을 모르는 일반인들을 위해 번역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관점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개화기에 이르러 외국과의 접촉이 많아짐에 따라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개혁하려면 민중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폭넓은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죠. 교육기관과 신문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번역을 통해 선진 학문을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제기됩니다. 한국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깨우치고 번역의 대중화를 역설한 사람, 바로 오늘의 주인공 서재필입니다.

여담이지만 서재필과 저는 인연이 깊은 편입니다. 제가 닉네임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서재는 사실 제 본명 '서재○'에서 온 것인데, 이 이름부터가 할아버지께서 서재필의 이름에서 마지막 글자만 바꿔 지으신 것이었거든요..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서재필을 우리나라의 0세대 번역가라고 한다면, 제가 번역가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아무쪼록 이번 포스트에서는 서재필이 전념한 계몽주의 운동의 중심에 번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에 두고, 그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서재필과 번역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그 내막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포스트 서두에 인용했던 서재필의 『독립신문』 논설문을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조선에 제일 급선무는 교육인데, 교육을 시키려면 남의 나라 글과 말을 배운 후에 학문을 가르쳐야 하거늘 교육할 사람이 몇이 못 될지라. 그런고로 각종 학문 책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가르쳐야 남녀와 빈부가 다 조금씩이라도 학문을 배울 것이니, 한문을 배워 가지고 한문으로 다른 학문을 배우려 하면 이십여 년이 지나도 그 나랏말 할 사람이 그중에 몇이 못 될지라.(서재필, 『독립신문』 제2권 제92호, 1897.8.5)


여기서 서재필은 당장 시급한 일이 바로 교육이라고 말하며 외국의 글과 말을 배운 후에 그것들을 한문이 아닌 국문(한글)으로 번역해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말하는 '외국'이 청나라가 아니라 일본과 서양 강대국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그가 조선의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근대화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서재필이 중국의 학문을 멀리하고 서양 학문을 우선시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글에서 눈여겨볼 점은 그가 선진 학문을 들여옴에 있어 한문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한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지요. 서재필은 새로운 학문을 엘리트층이 전유하지 않고 성별과 빈부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그가 『독립신문』을 한글로 발간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서재필은 단순히 한글로 글을 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글에 '빈칸 띄어쓰기'를 도입하는 파격을 선보입니다. 띄어쓰기는 갑오개혁 이전에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았고, 갑오개혁 이후에도 점을 찍거나 동그라미를 그리는 방식으로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빈칸으로 띄어쓰기를 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변화였습니다. 물론 한국어에 빈칸 띄어쓰기를 먼저 시도한 사람은 선교사 언더우드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대중화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은 서재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띄어쓰기를 도입한 이유는 대중이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띄어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서재필, 『독립신문』 창간호, 1896.4.7)


한편 서재필은 서양 학문을 번역해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위해 필요한 선결과제가 무엇인지도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국어사전을 편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재필은 당시에 표기법이 저마다 달라 읽기에 큰 혼란을 초래하므로 이렇게 중구난방인 표기법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문으로 책을 번역하려면 두 가지 일을 제일 먼저 해야 할 터이니라. (...) 바라건대 조선 학부에서 조선 국문 옥편을 만들어 말 쓰는 규칙과 문법을 정하여 전국이 그 옥편을 좇아 말과 글을 같게 쓰고 읽게 하며 각종 학문 책을 번역할 때에 이 옥편에 있는 규칙대로 일정한 규모를 가지고 하게 만드는 것이 조선 교육의 기초로 우리는 알고 (...) (서재필, 『독립신문』 제2권 제92호, 1897.8.5) 

 

서재필이 번역 사업의 두 번째 선결 과제로 제시한 것은 외국 서적을 전문적으로 들여와 발간하는 출판사를 많이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한국에는 출판사다운 출판사가 거의 없었고, 신문을 발행하는 신문사에서 단행본을 간혹 출간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서양 선교사들이 기독교 서적을 출간하기 위해 야소교서회(뒷날 조선기독교서회로 이름을 바꿈)나 광문사 같은 출판사를 세우기도 했지만 이 정도 수의 출판사로는 서재필이 바라던 것만큼 서양 근대 정신을 한국에 수혈하기에 역부족이었죠. 서재필은 한국에 출판 문화가 무르익어 대중에게 이로운 서적을 대량으로 보급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기를 꿈꿨습니다. 그는 독립신문 논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의 나라에서는 책 만드는 사람이 그 중에 몇 천명씩이요, 책 회사들이 여러 백개라, 책이 그리 많이 있어도 달마다 새 책을 몇 백 권씩 만들어 이 회사 사람들이 부자들이 되고 또 나라에 큰 사업도 되는지라. 조선도 이런 회사 하나씩 생겨 각종 서양 책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출판하거들면 첫째는 이 책들을 보고 농사하는 사람들이 농법을 배울 터이요, 장사하는 사람들이 상법을 배울 터이며, 각종 장인들이 물건 만드는 법을 배울 터이고, 관인들이 정치하는 법을 배울 터, 의원들은 고명한 의술들을 배우고 학교에 가는 사람들은 각국 역사와 수학과 지리와 천문학을 능히 배울지라. 문명 개화 하는 데 이런 큰 사업은 다시 없을 터이요, 장사하는 일로 보더라도 이보다 더 이익 남는 것이 지금은 없는지라. (서재필, 『독립신문』 제1권 25호, 1896.6.2)

 

서재필은 과거에 급제해서 처음으로 책자를 인쇄하고 문장을 교정하는 직책을 맡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관직에 있으면서 일찍부터 출판사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듯 서재필은 한국에 처음으로 번역의 중요성을 알린 사람으로서 가히 한국 번역사의 시조始祖라는 호칭을 붙이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서재필이 미국 체류 시절 해리힐먼 아카데미를 졸업하면서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을 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번역 실력이 그다지 출중하지는 못했다는 점은 다소 아쉽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 교육을 받았고 젊은 시절에는 제대로 된 한국어 교육을 받기 전에 일찍부터 일본 생활을 시작으로 해외에서 오래 체류한 서재필은 많이 퇴보한 한국어 실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쓴 한국어를 보면 '여전히'라고 써야하는 부분에 '가만히'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서재필이 영어로 먼저 'still'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그에 맞는 한국어 번역어를 떠올리는 순서로 한국어를 구사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과적으로 서재필은 한국에 진정한 번역을 처음으로 들여오고 번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선각자라는 점에서 한국 번역사에 큰 공헌을 했지만, 한국어와 번역 실력이 많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1세대 번역가로 보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번역가 중 대선배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선배 번역가 탐구> 2탄에서는 이에 관해 이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