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23. "번역본을 읽을 바엔 원서를 읽겠다구요?" ①

서서재 2021. 7. 20. 19:51

얼마 전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걸어 제가 번역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고맙게도 친구가 이런 제 소식을 굉장히 반기더라구요. 다독을 하기로 유명한 친구여서 서로 번역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제 블로그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번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번역 일 하는 사람한테 뭔가 미안한 말이지만, 중간에 번역이 끼면 말 그 자체의 느낌이 안 산다고 생각해서 원서로 읽을 수 있는 책은 원서로 읽으려고"

이 말을 듣고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친구는 어떠한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원문에 밀착된 좋은 번역을 많이 해달라는 권면의 의도로 남긴 말이었을까요? 그런데 '미안하다'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말을 듣고 번역가로서 어딘가 찜찜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번역서를 읽을 바엔 원서를 읽겠다'는 말은 제 친구에게서만 들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주변에서 '번역서가 형편없어서 차라리 원서를 바로 읽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보곤 합니다. 실제로 저 자신도 본격적으로 번역에 몸담기 전에는 번역서와 원서를 모두 읽을 수 있는 상황인 경우에 곧바로 원서를 읽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번역가가 되고 나니, 번역가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것 같기까지 한 저 말이 계속 신발 속 모래알처럼 남았습니다. '과연 번역서는 원서보다 가치가 없는 것인가, 번역가에게 번역서를 읽느니 원서를 읽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의중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번역서와 원서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들을 계속 읽었습니다.

여러 책을 뒤적거리다가 데이비드 벨로스가 「번역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이라는 글에서 정확히 위와 똑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번역본은 원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한 극과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번역본이 원작을 대신한다'는 다른 한 극 사이를 오가며 번역본과 원작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는데, 여기서 그의 글을 보면 '번역본 말고 원본을 읽겠다'는 말 뒤편에는 크게 두 종류의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벨로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프랑스어 수업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L'Étranger』을 읽어야 할 때, 학생들이 영어로 번역된 『이방인The Outsider』를 읽는 것을 본 교사는 권위적인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이렇게 훈계할 것이다. "번역본이 원작을 대신할 수는 없어!" 학생들은 원작 대신 번역본을 잘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교사가 어떤 진리를 말하기 위해 사람들의 통념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여기서 진리란 프랑스어로 된 책을 많이 읽어야 언어 실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번역에 관한 진실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더 근면하게 노력하도록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에서 그런 말을 한다. (데이비드 벨로스, 『번역의 일』, 「제4장. 번역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 p.55;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벨로스의 말에 따르면 "번역서 말고 원서를 읽겠다"는 말은 '번역서가 원서보다 열등한 것이다'(혹은 번역가는 작가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는 말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더 좋은 번역을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하는 말에 가깝습니다. 굳이 '번역가 따위는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야'라고 확대해석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건 괜히 제가 성격이 배배 꼬였다는 것만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말에 숨은 의미가 이것 하나만 있다면 말이죠:)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번역 이야기] 24. "번역본을 읽을 바엔 원서를 읽겠다구요?" ②

(앞선 글에서 이어집니다) [번역 이야기] 23. "번역본을 읽을 바엔 원서를 읽겠다는 말의 저의가 뭐죠?" ① 얼마 전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걸어 제가 번역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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