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24. "번역본을 읽을 바엔 원서를 읽겠다구요?" ②

서서재 2021. 7. 20. 19:52

(앞선 글에서 이어집니다)

 

[번역 이야기] 23. "번역본을 읽을 바엔 원서를 읽겠다구요?" ①

얼마 전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걸어 제가 번역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고맙게도 친구가 이런 제 소식을 굉장히 반기더라구요. 다독을 하기로 유명한 친구여서 서로 번역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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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포스트에서 "번역서를 읽느니 원서를 읽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심리에는 첫 번째로 "더 좋은 번역을 해주길 바란다"라는 권면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무언가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번역가에게 번역본을 읽지 않겠다고 말하다니요!

그러면 다시 한번 벨로스의 「번역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이라는 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원서를 더 가치 있게 여긴다는 발화에 숨겨진 두 번째 심리를 이렇게 파헤칩니다.

번역이 원작을 대신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은 진품, 다시 말해 번역본이 아닌 원래의 작품을 식별하고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식견이 자신에게 있음을 암시하는 셈이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을 테다. 두 가지 유형의 커피(인스턴트커피와 에스프레소 - 인용자)를 구분할 능력이 없으면 두 가지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본'과 '원본'을 구분하는 능력은 두 가지가 똑같다거나 대등하다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만큼 좋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다. (데이비드 벨로스, 『번역의 일』, 「제4장. 번역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 p.p.56~57)


평소에 '번역본을 읽을 바에는 원서를 읽겠다'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 분이라면 이 대목을 읽고 약간 뜨끔한 마음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벨로스는 그 말이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심리가 담겨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원서를 읽을 수 있을 만큼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에둘러서 표현하고 싶을 때 '원서를 읽는 게 빨라'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 세상에는 정말 형편없는 번역서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번역기를 사용한 것처럼 기계적이고 딱딱한 데다 주술호응같이 기본적인 문장 구성 원리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번역서가 예전엔 대다수였고, 지금도 여전히 출판되고 있습니다. 번역이 비교적 잘 된 사례라고 하더라도 번역본이 원전만큼 완성도 있고 훌륭한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죠. 예를 들어 근래에 출판된 번역 비평서 중 우리 번역 계에 가장 무거운 철퇴를 던지고 있는 『영미영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 1 · 2』(2005)는 영미권 고전 문학을 옮긴 번역서 중 원전에 가깝게 잘 번역된 책이 거의 없다는 뼈아픈 총평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더라도 번역본을 전부 치워두고 원서부터 읽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질 낮은 번역서가 존재한다고 해서 번역서 전반의 가치를 깎아내려선 안 된다는 생각도 들구요. 만약 "번역서를 읽을 바엔 곧바로 원서를 읽겠다"라는 말에 담긴 저의가 벨로스의 말대로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뽐내기 위해 젠체하는 말이라면,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원서를 읽을 외국어 실력이 된다면 원서도 읽고 번역서도 읽어야지 왜 원서만 읽느냐구요.

누군가는 "나에게는 번역서가 필요 없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도 번역서는 필요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풍부하고 충만한 독서 경험을 하길 원한다면 원서와 번역서를 같이 놓고 읽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번역본이 여러 종류라면 그것들을 모두 같이 놓고 읽는 게 제일 좋습니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책을 읽을 때 이해가 되는 부분만 골라서 이해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나 표현은 쉽게 건너뛰게 됩니다.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원서에 나오는 모든 표현의 사전적/함축적 의미를 파악하면서 읽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번역가는 이처럼 '띄엄띄엄 읽기'를 할 수 없고, 뜻을 모르는 표현이라고 해서 대충 넘어갈 수도 없습니다. 번역가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번역가는 단어 하나하나, 토씨 하나하나를 신경 쓰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좋은 번역가는, 비록 원전만큼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에 실패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자기식으로 소화해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철저한 읽기 끝에는 언제나 번역가가 원서를 이해한 내용, 곧 '해석'이 따라붙게 됩니다. 번역가는 결국엔 펜을 들고 무언가를 써내야만 하기 때문에 무의식중에라도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기 마련입니다. 원서에 있는 어떤 표현에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한국어로 옮길 때는 딱 대응되는 단어가 없어서 어떤 뜻을 골라야만 할 때가 있는데, 이러한 선택에도 번역가의 해석이 가미되지요.

번역가의 원서 읽기가 이러한 것이라면, 번역서가 이러한 과정 끝에 탄생하는 것이라면, 저는 묻고 싶습니다. 과연 불완전한 번역서라고 하더라도, 번역서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 가치를 폄하해도 되는지를요. 오히려 이렇게 원서를 나보나 먼저 읽어낸 사람이라면 그 목소리를 더 귀담아듣고 싶어지지 않는지요!?

단언컨대 번역서는 원서를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줍니다. 물론 독자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오역투성이 번역도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원서를 같이 읽을 수 있는 입장이라면, 혹은 여러 번역본을 함께 놓고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가다머Gadamer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오해도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사실상 모든 이해는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오해니까요. 다양한 번역본을 접할 수 있을수록 여러분의 독서 경험은 더욱 풍족해질 것입니다.

벨로스는 "모든 번역의 목적은 출발어를 모르는 독자들이 원본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데이비드 벨로스, 『번역의 일』, 「직역이라는 허구」, p.145)"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여기서 "출발어를 모르는"이라는 표현은 빼도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모든 번역의 목적은 독자들이 원본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글을 나가며

마지막으로 일본의 문호 오에 겐자부로의 독서법을 소개하며 이번 포스트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는 저서 『읽는 인간』에서 자신이 오랜 기간 실천해 온 독서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항간에 '색연필 독서법'이라고 알려진 바 있는 그의 독서법은 이렇습니다.

우선 빨간색과 파란색 색연필, 그리고 독파하고 싶은 책의 원서와 번역서를 준비합니다. 번역서를 읽어 나가면서 인상 깊은 구절에는 빨간색으로 밑줄을 긋고, 이해가 되지 않거나 원문의 표현이 궁금한 내용에는 파란색으로 밑줄을 긋습니다. 그리고 파란색으로 밑줄 친 부분을 원서에서 찾아 읽습니다. 이렇게 원서와 번역서를 교차해가며 책을 여러 번 읽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는 이렇게 원서와 번역서를 넘나들며 책을 읽고 자신의 언어를 닦아나갔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는 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존경받는 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번역서를 가까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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