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10. 번역가가 작가가 되는 순간! ① - 책 제목 번역의 재미와 어려움

서서재 2021. 7. 8. 04:31

출판사에서는 국내에 새로운 외서를 소개하기 위해 판권 계약을 하기 전에 번역가에게 리뷰를 부탁합니다. 원서를 한 번 읽어보고 그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팔릴 만한 책인지 그렇지 않은지, 국내에 소개한다면 어떤 독자들을 겨냥해서 마케팅을 하면 좋겠는지 등등 여러가지 의견을 묻죠. 여기에는 '책 제목을 어떻게 정하면 좋겠는지'도 포함됩니다.

 

제가 여태까지 검토했던 책들 중에는 본문 내용은 너무 재미있는데 원제가 밋밋하고 재미없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책들을 만날 때면 저는 쾌재를 부릅니다. 항상 저자가 한 말을 '받들면서' 저자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제가 이 순간만큼은 그 한계를 뻥 걷어차버리고 마치 작가가 된 것처럼 마음껏 창작의 열정을 불태워 제목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책에 원제와 다른 제목을 붙이는 것은 제가 저자를 공경할 줄 모르는 시건방진 번역가라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번역가가 원제와 다른 제목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일반적인 문화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평소에는 오역 하나라도 낼세라 저자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기 바쁜 번역가가 어떻게 이렇게 제목 번역에서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일까요?  노승영 번역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원제는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다. 심지어 원서의 제목도 저자가 정한 것은 아닌 경우가 많다. 원서의 저자와 편집자가 제목을 놓고 실랑이를 벌일 수는 있지만 저자의 제목이 늘 관철되는 것은 아니다. 편집자는 저자보다도 제 나라 독자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정한다. 그렇다면 번역서의 편집자 역시 책을 읽게 될 국내 독자를 감안해 제목을 정하는 게 마땅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노승영, '[번역의 세계] 수백 쪽 잘 옮기고 한 줄 제목에 운다', 20160803)

 

명쾌한 답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 제목도 저자의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라니! 이렇게 본다면 고전을 번역할 때 제목을 함부로 지어내지 못하는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고전작품의 원제를 출판사에서 정해줬을 리는 만무할 테니 말이죠. 그러니 '책 제목을 지을 때 편집자나 출판사의 창조적 개입이 있었겠는가'하고 자문했을 때 'Yes'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번역할 때에도 역시 제목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반대로 'No'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원제를 철저히 직역해야 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번역가가 책 제목을 자유롭게 붙일 수 있다고 해서 마냥 형편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책의 본질을 찰떡 같이 담아내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좋은 제목을 짓는 일은 정말정말 어렵기 때문이죠. 본문을 잘 번역해 놓고도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골머리를 앓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노승영 번역가도 책 제목 짓기에 얼마나 많은 옥신각신이 존재하는지 밝히며 제목 짓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충분히 내 관심을 끌 만했다. 번역 검토서를 써서 에이전시 뉴스레터에 실어 보냈다. 그때 붙인 번역 제목이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이었다. 원제는 ‘The Social Behavior of Older Animals’, 직역하면 '늙은 동물의 사회적 행동'쯤 되겠다. 한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여왔다. 판권 계약을 하고 번역을 시작했다. 2015년 2월 23일에 최종 원고를 보냈고 2016년 5월 9일에 교정지를 받았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제목을 두고 내부에서 이견이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과학책이니만큼 제목도 내용에 충실하게 붙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직접 대안까지 제시해 왔다. ‘늙은 개체로 무리에서 산다는 것’, ‘나이 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 등등. 그러면서 제목 회의 전까지 의견을 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 아무리 고민해도 더 나은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다. 출판사에도 아무 얘기 하지 않았다. [...]

본문의 요점을 정확히 담아내면서 사람들의 눈길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제목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의젓하면서도 애교 많은' 자식을 바라는 것과 같다. 두꺼운 책의 본문을 애써 번역해놓고도 표지의 제목 한 줄 때문에 번역자는 물론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의 노고까지 허사가 되는 수가 왕왕 있다. 오늘도 출판사 사람들이 제목 회의에 그토록 목을 매는 이유는 이처럼 애달픈 사정이 깔려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독자들은 아실지.

 

책 제목 짓기가 어려운 일이라면 그것을 쉽게 해줄 만한 도우미가 있어야 하겠죠? 다음 포스팅에서는 제목을 지을 때 참고할 수 있을만한 '꿀팁'들을 모아보겠습니다. 

 

(다음 글)

https://ssjstudylog.tistory.com/61?category=875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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