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11. 번역가가 작가가 되는 순간! ② - 책 제목 번역 꿀팁 모음

서서재 2021. 7. 8.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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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야기] 10. 번역가가 작가가 되는 순간! ① - 책 제목 번역하기

출판사에서는 국내에 새로운 외서를 소개하기 위해 판권 계약을 하기 전에 번역가에게 리뷰를 부탁합니다. 원서를 한 번 읽어보고 그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팔릴 만한 책인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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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목에 어떤 유형들이 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김학원 편집자는 제목이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제목의 여섯 가지 유형은 다음과 같다. 

'명사'형 (토지, 객지, 아리랑, 연어)
'명사+명사'형 (노인과 바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이성과 광기)
'형용사+명사'형 (외딴 방, 슬픈 열대, 하얀 전쟁)
'구/절+명사'형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문장'형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빠가 돌아왔다, 엄마를 부탁해)
'의성어/의태어' 조합형 (어 그래, 앗! 수학이 수군수군, 와우, 물렁물렁한 책)

세계적으로 1년에 수십만 종이 쏟아지는 신간들의 제목은 대부분 이 여섯 가지 기본형에 속한다고 하네요. 

 

다음으로는 제목을 짓는 전략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제목에도 유행이 있다 = 올해 번역된 인문교양서 가운데에는 '…의 배신'이라는 제목의 책들이 눈에 띈다.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긍정의 배신(원제 Bright-sided)' '경제학의 배신(The Value of Nothing)' '윤리학의 배신(Experiments in Ethics)' '상식의 배반(Everything Is Obvious)' 등이 모두 원제와는 상관 없이 '배신'과 '배반'을 제목에 넣었다. 이 책들은 모두 특정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무너뜨리거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지적하는 책들로, 내용을 함축하고 강렬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제목으로 '배신'을 택한 것이다. 비슷한 뜻으로 '지식의 역습(The way of ignorance)' '우유의 역습(Lait, Mensonges et Propagande 우유, 거짓말과 선전)' '소금의 역습(Vorsicht Salz. 소금 조심)' 등 '역습'도 애용되는 단어다. 이와 함께 '생각의 탄생(Sparks of Genius)' '전략의 탄생(The Art of Strategy)' '경영의 탄생(50 Management Ideas You Really Need to Know)' '성경의 탄생(The World of The Bible)' 등 '탄생' 시리즈도 있다.

◇후광 효과를 노려라 =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부제가 책에 권위를 더해주면서 어려운 제목만으로는 선뜻 손이 가기 어려운 책에 접근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행복의 조건-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Aging well)' '하버드 글쓰기 강의(How to be a writer)' '하버드 52주 행복연습(Even Happier)' 등이 원제에는 없던 하버드를 제목이나 부제에 넣으며 '하버드 후광 효과'를 노렸다. 
앞서 베스트셀러가 된 같은 작가의 전작에서 제목을 빌려오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출간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생각 버리기 연습'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올해 출간된 '화내지 않는 연습' '행복하게 일하는 연습' 등도 모두 '연습'을 붙여 전작과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생각 버리기 연습'의 경우 일본어 원제를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뒤의 두 책은 직역하면 '이제 화내지 않는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방법' 정도의 제목이었다. 미국 작가 빌 브라이슨의 경우도 직역한 전작 '거의 모든 것의 역사(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의 인기 이후 후속작의 제목도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At Home: A Short History of Private Life)'로 정해졌다.

◇자기계발서, 긴 제목으로 눈길 끌어야 = 함축적인 제목을 선호하는 인문서 등과 달리 자기계발서는 감각적이고 마음을 울리는 긴 제목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경우가 많다. 최근 출간된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의 경우 원서는 '가방 다시 꾸리기(Repacking your bags)'라는 짧은 제목이었지만 눈길을 끄는 번역서 제목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Shifting Sands)'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Whale Done!)'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The Education of Little Tree)' 등도 시 구절을 연상시키는 제목으로 사랑을 받았다.

◇직역으로 정면승부 = 반면 원서의 제목을 그대로 번역한 제목으로 정면승부해 좋은 성과를 거둔 책들도 있다. '아웃라이어(Outliers)' '겅호(Gung Ho!)' '넛지(Nudge)' '스눕(Snoop)' 등은 언뜻 와 닿지 않는 원어 제목을 무리하게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둔 전략이 주효했던 책들이다.

 

한편 '좋은 제목'이 있다면 '나쁜 제목'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김학원 편집자는 제목을 지을 때 지양해야 하는 네 가지 경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명성을 얻은 제목이나 잘 팔리는 책 제목을 따라 하는 경우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따라 한 《남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일시적으로 시선을 끌었지만 자기 개성을 표현하지 못해 금방 평대에서 사라졌다. 

둘째, 성공한 책의 제목에 번호를 달아 책들을 연이어 붙이는 경우도 신중해야 한다. 조상들의 금전 지혜를 담은 《되는 집안은 가지나무에 수박 열린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1, 2를 넘어 5권까지 연이어 발행됐지만 대부분 반품으로 돌아와 출판사는 치명타를 맞았다. 

셋째. 책을 다 읽어야만 그 뜻을 이해하는 제목, 기억하기 어려운 제목은 책의 실종을 불러 온다. 《미디어 아라크네》, 《페르세폴리스》 등은 제목만으로는 어떤 책인지 알 수 없고, 책을 읽고 나서도 제목을 기억하기 어렵다.

넷째. 근거 없이 감각적인 제목이다. 《야한 유전자가 살아남는다》는 원제 《The Prehistory of Sex: four million years of human sexual culture》를 대중적인 감각으로 손질했지만 인문 교양서에서는 벗어난 제목이다. 차라리 원제 그대로 《선사시대의 섹스》라 하고 '400만 년 동안의 인류 성문화'를 부제로 하거나 과감하게 《원시인의 섹스》나 《원시인의 사생활》이라 해도 좋았을 것이다. (193-194)

 

마지막으로 현역 번역가의 역서 중 원제를 따르지 않고 제목을 창작한 사례들을 검색해보고 제목 창작의 '감'을 익혀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노승영 번역가의 제목 번역 사례들을 쭉 훑어보는 것으로 이번 포스트를 마치겠습니다. 

번역서의 제목을 완전히 새롭게 창작하는 것은 어떨까. 이 경우는 가장 까다로우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자칫 오역 시비가 일기라도 하면 제목부터 걸고넘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제목에 ‘낚였다’라는 비판을 부를 위험성도 다분하다.하지만 때로는 제목의 번역 과정에서도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잘되는 자녀는 아버지가 다르다It’s a Guy Thing』
『크레이그 벤터, 게놈의 기적A Life Decoded』
『흙을 살리는 자연의 위대한 생명들Life in the Soil』
『이단의 경제학Stability with Growth』
『스핀닥터, 민주주의를 전복하는 기업 권력의 언론 플레이Thinker, Faker, Spinner, Spy』
『촘스키,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Hopes and Prospects』
『나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권리가 있다The Right to Know』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In Defense of Animals』
『측정의 역사World in the Balance』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The End of Growth』
『자연 모방Harnessed』
『숲에서 우주를 보다The Forest Unseen』
『총을 든 아이들, 소년병Child Soldiers』
『아룬다티 로이,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Listening to Grasshoppers』
『산부인과 의사에게 속지 않는 25가지 방법Expecting Better』
『만물의 공식The Formula』
『누구를 구할 것인가?The Trolley Problem』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Intuition Pumps and Other Tools for Thinking』
『여자로 태어나길 잘했어!Why It’s Great to be a Girl』
『왜 인간의 조상이 침팬지인가The Third Chimpanzee for Young People』
『소셜 미디어 2000년Writing on the Wall』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The Long and the Short of It』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The Social Behavior of Older Animals』

 

참고자료

김학원, 『편집자란 무엇인가』, 휴머니스트, 2009.
"제목 장사가 반" .. 번역서 제목 짓기 '백태' (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2011. 07. 24)
[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2. 책의 요점도 살리고 눈길도 끌고 싶지만 - 수백 쪽 잘 옮기고 한 줄 제목에 운다 (카카오, 노승영 번역가, 2016. 08.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