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08. 저자와 독자를 알기 위한 노력

서서재 2021. 7. 6. 22:48

보편 해석학을 창시하면서 번역 이론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기고 그 자신도 기라성 같은 번역가였던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는 번역가가 독자를 저자에게 데리고 가거나 저자를 독자에게 데리고 가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말은 '직역이냐 의역이냐'는 해묵은 논쟁을 대변하는 말로 흔히 이해되어 왔는데요,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문제로 슐라이어마허의 이 말을 끌고 들어가기에 앞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저자가 누구고 독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이지요. 저자가 누구고 독자가 누군지를 명확히 알아야 저자를 독자에게 제대로 데려갈 수 있고 독자를 저자에게 제대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포스트에서는 직역과 의역 사이의 논쟁에 관해 다루기에 앞서, 저자와 독자를 제대로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에 관해 짧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저자를 알기 위하여

 

앞서 인용한 슐라이어마허는 저자와 똑같은 언어와 역사적 맥락과 지식을 공유한다면 완벽한 번역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아니, 거기에 더해 원저자를 넘어서는 번역마저도 가능하다고 보았죠. 굉장히 이론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실제로 번역가가 어떤 저자를 번역할 때 가져야 하는 자세의 한 극에 해당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번역가 중 한 분이신 이종인 번역가님은 정말로 원저자를 통째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서 번역에 임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분이 온전한 번역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로 공부를 하시는지를 알고 나면 정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이종인 번역가가 공부하는 여러 방법 중에 한 장면만 뽑아서 살펴보겠습니다. 

1998년도에 번역한 시공사의 《라캉》은 정말 어려운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원서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서문과 1장의 앞부분을 읽었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던 일은 아직도 기억난다. 시중에 나와 있는 라캉 관련 서적 10여 권을 모두 사들여서 독파하고 원서를 네 번쯤 읽으니까 어느정도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 1996년에 시공사의 《프로이트》를 번역할 때 시공사의 호의로 프로이트 관련 영문서적을 여러 권 구입하여 읽었고 또 내가 가지고 있던 펭귄판 프로이트 전집 15권을 통독한 적이 있다. (이종인 외, 『번역은 내 운명』, p.179)

 

 

독자를 알기 위하여

 

저자를 알기 위해서는 저자가 쓴 글이나 저자에 관한 글을 몽땅 읽어보고, 저자 본인과 연락을 취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독자를 알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쓰는 글을 읽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하는 것 자체만으로 글의 방향은 크게 달라지는 것 같은데요, 독자가 어떤 연령대이고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동기로 번역서를 읽게 될지 생각하면서 번역에 임한다면 분명히 저자를 독자에게나 독자를 저자에게 더 정확하게 데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독일에서 학술적 글쓰기 교육의 대부로 손꼽히는 오토 크루제Otto Kruse의 글쓰기 팁을 살짝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비록 논문을 쓰는 학생들을 위해 쓰인 내용이지만, 여기서 크루제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은 번역가를 비롯하여 모든 글쓰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영양가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수신자를 전제해야만 글의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다.

텍스트의 명료성은 우리가 특정 수신자 그룹을 전제하고 그들을 염두에 두면서 글을 써야만  달성될 수 있다. 수신자의 선택은 첫째로 사람들이 텍스트에서 얼마나 많은 사전 지식을 전제하고 있는가를 결정한다. 수신자가 전문가라면 하나하나 정의하지 않고 안심하고 전문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반대로 문외한에게 말을 건다면 전문 지식과 연결해서는 안 되고, 모든 개념을 설명하거나  전문개념 대신에 일상에서 따온 낱말을 사용해야 한다. 텍스트의 수신자를 분명하게 확정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매 표현을 선택할 때마다 글쓴이는 자기 분열을 경험해야만 할 것이다.

가상의 수신자를 전제하는 법

이레네 클라크(Irene L. Clark, 2002, p.156)는 ‘청중 분석 표’를 제시한다.
① 수신자는 누구인가? 수신자는 주제에 대해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② 수신자는 내 주제를 알고 있는가? 글의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인가?
③ 수신자가 내 텍스트를 읽고 나서 내 주제를 어떻게 생각하기를 원하는가?
④ 수신자가 텍스트를 읽고 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동질적인 수신자 그룹을 전혀 구성할 수 없다면, 세 개의 상이한 수신자를 상상할 수 있다.
① 이상적인 수신자
②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수신자
③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는 수신자 (오토 크루제, 『공포를 날려버리는 학술적 글쓰기 방법』 p.p. 3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