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07. AI는 인간 번역가를 대체하게 될까? (2) - 기계 번역의 미래와 인간 번역의 미래

서서재 2021. 7. 6. 22:01

과연 기계번역은 이렇게 언어의 불완전성을 메우는 읽기를 하고, 이에 기반해서 번역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정영목 번역가는 오늘날 기계번역이 거두고 있는 성공이 이러한 '창조적 독해'를 포기함으로써 가능해졌다고 지적합니다. 

기계번역에는 물론 읽기가 없다. 아니, 읽기가 사라졌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RMT(Rule Based Machine Translation) 시절에만 해도 마치 외국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구문 분석을 하는 등 인간의 읽기와 비슷한 요소가 어느 정도 있었으나, SMT(Statistical Machine Translation)를 거쳐 NMT(Neural Machine Translation)로 오면서 읽기, 적어도 인간적인 읽기의 요소는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읽기 없이 번역이 가능할까? 하지만 인공지능은 바둑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바둑을 두고 승리를 거두는 것처럼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번역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것은 기표만 존재하는 번역, 기의가 완전히 배제된 번역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렇게 기의를 버리면서, 즉 읽기를 그만두면서 번역의 결과는 월등히 나아졌다.

 

비행기가 새를 닮는 것을 포기하면서 더 하늘을 잘 날 수 있게 된 것처럼, 기계번역도 인간처럼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더 번역을 잘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롭죠?

 

하지만 비행기가 아무리 하늘을 잘 난다고 하더라도 새처럼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 앉아 벌레를 잡을 수는 없는 것처럼, 비행기의 '날기'는 새의 '날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AI가 하는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계가 하는 번역과 인간이 하는 번역은 서로 질적으로 다른 번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번역의 길과 기계번역의 길은 분명히 갈라졌다. 기계에게는 인간처럼 읽는다는 것, 즉 해석을 통하여 창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오히려 읽지 않는 쪽이 효율이 좋다는 것이 증명됐다. 따라서 기계는 텍스트를 읽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상당한 이익과 상당한 손해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익이란 창조적 읽기가 깊이 개입될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는 기표 빅데이터만 가지고도 엄청난 번역 능력을 보여주게 되었다는 것이고, 손해는 창조적 읽기를 매개로 한 번역은 거의 포기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인간 번역가에게는 희망적인 소식처럼 들립니다. 기계 번역이 질적으로 인간 번역과 다르다면,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하더라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번역의 자리가 남아있을 것이라는 말 아닐까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습니다. 인간이 하는 번역 중에서도 기계적인 성격이 강한 번역은 결과적으로 인공지능에게 맡기는 것이 더 빠르고 효율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어휘와 정보를 반복하는 설명조의 비문학 텍스트일수록 인간 번역가를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경향이 두드러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건은 인간적인 번역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에 있어 보입니다. 과연 기계번역과 차별화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번역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만이 할 수 있고 인간이 잘 할 수 있는 번역이란 무엇인지를 이미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는 하나의 예시로서, 김화영 교수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포스팅을 마쳐볼까 합니다. 

  소설 『이방인』의 첫 줄 "Aujourd 'hui maman est morte"를 반드시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가 아니라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프랑스어 원문의 언어적 해석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 기이한 소설 주인공의 정교한 심리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엄마maman"라는 표현만을 사용한다. 이 단순하고 친근한 표현은 뒤이어 등장하는 전보문 속의 "모친 사망"이라는 격식 갖춘 문체와 강한 대조를 보인다. 이는 이 인물이 법정의 검사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어머니에 대하여 무한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줄 "Longtemps je me suis couche de bonne heure(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의 번역이 어려운 것은 이 짧은 문장 자체의 의미가 난해해서가 아니다. 이 첫 문장은 이 기나긴 소설의 마지막 권, 마지막 문장 "(...) 그래서 만약 나에게 내 작품을 완성하기에 충분할 만큼 긴 시간(longtemps)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나는 반드시 거기에다 무엇보다 먼저, 인간들이, 비록 그렇게 하다가 그 인간들을 그만 괴물 같은 존재들로 만들어놓는 한이 있을지라도, 공간 속에 할당된 그토록 한정된 자리에 비긴다면 너무나도 엄청나게 큰 자리, 공간 속에서와는 반대로, 한없이 길게 연장된 ― 기나긴 세월 속에 몸담고 있는 거인처럼, 그 사이의 거리가 그토록 먼, 그들이 살았던 여러 시기들, 그토록 많은 나날들이 차례차례 그 사이에 와서 자리잡는, 여러 시기들이 동시에 닿아 있으니까 ― 자리를 시간(le temps) 속에 차지하도록 그려보고 싶다"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첫 줄의 'longtemps시간'는 마지막 문장에서 두 번이나 반복된다. 마지막 문장에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주인공은 이 소설의 첫 줄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예는 번역이 작품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김화영, 『김화영의 번역수첩』, p.p.3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