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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피터 마셜 『불가능을 요구하라』24. 엠마 골드만 (6) 골드만의 성 정치학

서서재 2021. 1. 6. 15:39

(앞에서 계속)

 

골드만은 자유로운 사랑을 말로만 이야기하지 않고 직접 실천했다. 그는 다른 여성과 최소한 한 번 이상 연인 관계를 맺었는데, 그가 이십 대였을 때 버크먼을 포함하여 예술가 페디아(Fedya, Modest Stein의 예명)와 함께 세 명이 동거 생활(méage àrois)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서른여덟이 되던 해인 1908년에는 아홉 살 어린 벤 라이트만(Ben Reitman, 1879-1943)과 연인이 되었다. ‘부랑자들의 부랑자’라고 불리던 라이트만은 시카고에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의사였다. 그렇게 독립적인 존재가 될 것을 부르짖었던 골드만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이 ‘잘생긴 야수’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라이트만은 골드만의 내면에서 ‘근원적인 욕망의 격류’가 일어나게 했고, 골드만은 남자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골드만은 자신이 “부끄러움 따윈 잊고 원초적인 욕망의 부름, 그 날것이 주는 아름다움과 황홀경에 응답했다”고 시인한다.


라이트만은 골드만과 10년에 걸쳐 교제하는 동안 자주 다른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골드만은 라이트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마다 안절부절 못하면서 질투심을 느꼈다. 골드만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애를 끓였다는 사실은 그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으로 사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골드만 또한 그렇게 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라이트만에게 이러한 글을 남겼다. “나 자신부터가 사랑의 가련한 포로가 되었으니, 나는 자유에 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골드만은 연인에게 바람맞은 채 쓸쓸하게 혼자 남겨진 경험 속에서도 맥없이 모순적인 사람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경험들을 했기에 그는 더욱 깊이 있는 생각을 하고 대중에게 더 무게감 있는 말들을 할 수 있었다. 


1912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에세이 「질투」에서 골드만은 연인의 사랑을 얻지 못해 고통을 느끼는 것과 연인의 사랑을 얻은 이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실연의 고통은 많은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질투심은 사람을 분노에 빠뜨리고 옹졸하게 만들 뿐이다. 또한 골드만은 실연의 고통도 교회와 국가에 의해 지탱되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사랑이 명예라는 철 지난 관습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소유와 복수라는 관념에 기반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남자의 자만심과 여자의 시기심이 얽혀있는데, 골드만은 이것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첫째로 그 누구도 상대방의 성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과 의무에서 비롯되지 않은 사랑만을 사랑으로 인정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연인은 사랑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골드만은「자유연애의 그릇된 기초」라는 강연에서 자유연애는 헌신이 공존하는 것으로서 무분별한 난봉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같은 시기에 골드만은 라이트만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섹스를 사랑하지만, 나의 사랑은 헌신과 보살핌, 불안과 인내, 그리고 우정이기도 합니다.” 골드만은 언제나 사랑에 관해 낭만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랑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사랑의 ‘야수성’을 찬미하였고, 사랑이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골드만이 자궁내막증을 앓아서 불임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남자를 만나기 쉬웠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아이를 갖기 위해 수술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병을 고치는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자발적으로 임신을 조절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모성애가 없지 않았다. 그는 라이트만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당신에게 크고 깊은 모성을 느낍니다. 이 본능은 우리 관계의 또 다른 지지대였어요.”


물론 골드만은 모성이 신화에 불과하다고 일축했으며, 모든 여성은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부모가 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역설했다. 더 나아가, 그는 임신 조절을 막는 법에 맞서 싸우다가 1916년에 투옥되기까지 했다. 골드만의 다음 세대 페미니스트인 마거릿 앤더슨(Margaret Anderson)은 골드만이 “여성이 항상 입을 닫고 자궁을 열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다가 옥살이를 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골드만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으면서, 성별에 상관없이 각자 동등하게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요구했다. 그는 여성이 자신의 몸의 주인이 되어 임신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원했으며, 남녀가 자유롭게 결합하여 살면서 각자가 독립적이고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는 외부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이 변화하는 혁명, 경제적 코뮤니즘뿐만 아니라 가치들이 완전히 변모하는 혁명을 꿈꿨다. 


말년에 골드만은 자신이 동시대인들의 주변을 겉돌 뿐이었다고 자인하였지만, 그의 사후로 새로운 사람들이 그의 말에 점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골드만은 오늘날 널리 읽히고 있으며, 그가 인간을 억압하는 기구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모두가 온전하게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부르짖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엠마 골드만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중 한 명이었으며, 조롱받고 무시당한 적도 있었지만, 근대 페미니즘의 영웅이었고 아나코-페미니즘(Anarcho-feminism)의 창시자였다. 어느 아나키스트 사교 모임에서 골드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혁명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