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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피터 마셜 『불가능을 요구하라』24. 엠마 골드만 (2) 생애

서서재 2021. 1. 3. 20:23

ㅂ(앞에서 계속)

 

골드만은 저술과 편집 활동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순회 강연을 이어나갔다. 그는 미국 역사상 누구보다 신출귀몰하면서 가장 청중을 많이 끌어모으는 연설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입을 막으려는 경찰과 사조직이 존재했지만 소용없었다. 1910년에 그의 저작 중 가장 이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아나키즘 에세이 외(Anarchism and Other Essays, ’저주 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옮김, 우물이있는 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됨)』가 출간되었을 당시에도 골드만은 37개 도시를 돌며 120회에 걸친 강연을 통해 2만 5천 명의 청중들 앞에서 연설했다. 1914년에는 희곡에 관한 그의 강연들이 『근대 희곡의 사회적 의미(The Social Significance of the Modern Dram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하우프트만이나 입센의 작품을 강하게 옹호하며 희곡이 급진적 사고를 퍼뜨리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보면서도,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희곡의 미학적 측면이 가지는 중요성에 관해서도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코안경을 쓴 이 작은 혁명가는 법과 정부, 그리고 사유 재산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끼치는지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 탓에 반복해서 정부 당국과 충돌을 빚었다. 골드만은 임신 조절에 관한 문헌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두 번째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가장 오래 감옥에 갇혔던 것은 징병 거부 연맹 수립에 참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반대 집회를 조직했을 때였다. 골드만과 버크먼은 1917년에 징집을 방해하기 위해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어서 그들은 미국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다른 ‘사회 부적합 적색분자들’과 함께 1919년에 러시아로 추방당했다. 당시 추방을 앞두고 골드만의 심리를 진행했던 존 에드가 후버(J. Edgar Hoover, 1895-1972, 미연방수사국(FBI)의 창설과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침 - 옮긴이)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 중 한 명”이라고 칭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골드만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에 대해 너무 크게 상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에 있을 때 ‘이 세계에 희망찬 미래를 안겨줄 사건’으로 추켜세웠던 러시아 혁명을 직접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골드만은 혁명을 위하여 기꺼이 마르크스주의의 중앙집권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억누르고 볼셰비키와 함께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고 공산당원들이 특권을 누리는 현실을 보며 곧바로 실망하고 만다. 골드만과 버크먼은 혁명에 관한 문서를 모아 아카이브를 구축하기 위해 온 나라를 여행했는데, 점점 비대해지는 관료주의와 정치적 숙청, 그리고 강제 노역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의 실망감은 크론시타트 봉기가 실패로 끝났을 때 정점에 도달했다. 1921년 3월, 페트로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파업이 연이어 일어났고, 크론시타트(페트로그라드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코틀린섬의 항구 지역 - 옮긴이)의 수병들은 파업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때 노동자와 수병이 요구한 사항에는 식량 배급을 균일하게 해달라는 것과 좌익 단체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하라는 것, 그리고 소비에트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등이었다. 이 봉기가 트로츠키와 적색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자 골드만과 버크먼은 러시아에 더 머물 수 없겠다고 생각했고, 볼셰비키의 승리가 혁명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21년 12월에 두 사람은 여권을 발급받아 유럽으로 떠난다. 


골드만은 러시아에서 보낸 2년을 『러시아에서 깨진 나의 환상』(1923)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적어 냈고, 이듬해에 영국에서 『러시아에서 깨진 나의 환상 2』(1924)를 앞선 책과 함께 한 권으로 묶어 출간했다.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골드만은 레닌을 만났을 때 신경제 정책(New Economic Policy)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려고 했다가 금세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레닌이 믿는 신이며 모든 것이 그 신을 위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 또한 서술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도 초창기에는 강한 리버테리언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골드만은 러시아 혁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게 된 이유가 마르크스주의의 정부 권력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에 있다고 적었다. 이후에 골드만은 볼셰비즘이 실질적으로 자발적인 형태의 코뮤니즘이라기보다는 ‘강압적 국가 공산주의’였다고 역설했다. 국유화된 경제와 경직된 중앙 계획과 배타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 공산당을 보았을 때, 볼셰비즘은 국가 자본주의와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골드만은 그 어떤 차르보다도 스탈린이 더 절대적인 독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러시아를 떠날 즈음에도 골드만과 버크먼은 미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버크먼은 프랑스에, 골드만은 영국에 자리 잡게 되었다. 골드만이 영국에 오자 레베카 웨스트(Rebecca West)는 골드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러시아에서 깨진 나의 환상』에 서문을 작성해주었지만, 골드만은 달갑지 않은 메시지를 가지고 왔던 탓에 대중의 주목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볼셰비키를 규탄했던 탓에 급진주의자들 사이에서 사실상 혼자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1924년에 레베카 웨스트를 비롯한 몇 명이 골드만에게 열띤 환영을 보내며 연설을 부탁했지만 골드만이 볼셰비키를 강도 높게 비판한 다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골드만의 대중 강연에는 날이 갈수록 오는 사람이 적어졌다. 러시아 희곡 작가들에 관한 통찰을 담은 원고를 발간해줄 출판사마저도 골드만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편 독학으로 공부한 웨일스 출신의 광부 제임스 콜턴(James Colton)은 1925년에 골드만이 추방당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과 결혼하여 영국 국적을 취득할 것을 제안했고, 골드만은 콜턴이 ‘달콤한 연대’라고 표현한 바 있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영국 시민권을 갖게 된 골드만은 그렇게 해서 프랑스와 캐나다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는데, 1934년에는 미국에 순회 강연을 떠나는 것마저도 가능하게 되었다. 


골드만이 노년에 경험한 가장 큰 사건은 스페인 혁명이었다. 1936년 버크먼의 자살과 파시즘의 부상 속에서 실의에 빠진 골드만은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이 독재자 프랑코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 힘을 얻었다. 67세의 나이로, 그는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1936년 9월에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마침내 아나키즘이 승리를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골드만은 이베리아 리버테리언 청년 연합(Federación Ibérica de Juventudes Libertarias)의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혁명 덕분에 아나키즘이 무질서를 주장한다는 생각은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골드만은 아나키스트 그룹 CNT-FAI (전국 노동자 연합 &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 Confederacón Nacional del Trabajo & 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와 함께했는데, 한번은 회원 만 명이 골드만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였고, 골드만은 그들이 “나머지 세계에 귀감이 되는 빛나는 선례”라는 말을 해주었다. 골드만은 CNT-FAI의 영어판 회보를 편집하면서 영국에서 그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대의를 알리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혁명에 대한 골드만의 높은 기대는 다시 한번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CNT-FAI의 아나키스트들이 1937년에 전쟁에 대비하려는 노력에서 점점 더 강성해지는 공산주의자들과 타협하여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것이 아나키즘이 이루고자 하는 이상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그의 예견은 정확했다.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혁명이라면 프랑코와 맞서 싸우는 것과 동시에 이상을 향해 앞서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골드만은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정부에 참여하고 군대를 무장시키기로 타협하는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남는 선택지가 공산주의 독재밖에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1937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연합 총회에서 골드만은 “불난 집”에 갇힌 스페인 동지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타버린 살갗”에 “염산”을 붓는 행위나 마찬가지나 다름없는, 연대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선언했다. 일 년 뒤에 골드만은 버논 리처드(Vernon Richards)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비록 내가 많은 부분에서 스페인 동지들과 의견을 달리했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동료들에 의해 오해를 받기도 하고 노동자와 모든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에게 배신을 당하면서도 벽을 등진 채 모든 세상에 맞서서 너무나 영웅적으로 싸웠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CNT-FAI의 투쟁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든, 그 사람들이 취했던 두 가지 위대한 행동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권력을 잡고서도 독재를 수립하지 않았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파시즘에 대항하여 일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골드만은 스페인에서 프랑코가 승리를 거두고 유럽에서 파시즘이 확산하는 것을 보며 완전히 낙담했지만, 아나키즘에 관한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그는 1940년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독재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의회 제도와 소위 ‘정치적 민주주의’라 불리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아나키즘을 “가장 아름답고 현실적인 철학”이라고 여겼으며, 언젠가는 사람들이 아나키즘이 옳았다는 사실을 알아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골드만은 1940년에 토론토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3개월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끝내 허가를 받아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죽기 전까지 50년간 그의 인생의 궤적을 바꿔놓았던 헤이마켓 순교자들에게서 멀지 않은 시카고 묘지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