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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피터 마셜『불가능을 요구하라』 24. 엠마 골드만 (1) 생애

서서재 2021. 1. 1. 18:17

24

엠마 골드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엠마 골드만 (1869-1940)


엠마 골드만은 사상가라기보다는 활동가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드윈과 바쿠닌의 작업에서 암시되기만 했을 뿐인 페미니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아나키즘 이론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여성의 예속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적 측면에서의 개인주의와 경제적 측면에서의 코뮤니즘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종합해냈다. 아나키즘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말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선구적으로 임신 조절을 역설하고, 볼셰비즘을 비판하는 동시에 스페인 혁명을 옹호하였던 골드만은 동시대의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손꼽혔다. 그의 이름은 그가 죽고 나서도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은 명성을 얻고 있다.


골드만은 1869년 러시아의 유대인 게토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에서 뜻하지 않게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포펠란의 외딴 마을에서 자랐는데, 그의 부모는 작은 여관을 운영했다. 나중에 골드만은 자신이 항상 주변의 것에 저항하는 아이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노예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심한 반감이 들었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사랑이 죄악시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가 열세 살이 되던 해인 1882년에 그의 가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대인 지구로 이사했는데, 이 시기는 알렉산드르 2세(1818-1881) 차르가 암살된 직후였다. 이 당시에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탄압은 극심했고 유대인 공동체는 한바탕 쑥대밭이 되었으며 경제 상황은 무척 안 좋았다. 골드만의 가족은 빈곤해졌고, 이에 따라 골드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다녔던 학교를 반년 만에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급진주의자인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골드만은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1818-1883,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 옮긴이)의 『아버지와 아들』(1862)을 읽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허무주의자가 ‘어떠한 권위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아무리 사람들이 떠받드는 원칙이라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이후 성장에 더 큰 영향을 준 작품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Nikolai Chernyshevsky, 1828-1889)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였다. 이 책의 여주인공인 베라는 허무주의자로 전향하여 이성 간에 자유롭게 우정을 쌓는 세계에서 살면서 제약 없이 세상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서로 협동하는 삶을 누린다. 이 책은 골드만이 이후에 따르게 될 아나키즘의 씨앗을 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골드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살겠다는 결심을 다지게 해 주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아버지는 이 중 어느 것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던 아버지는 골드만의 어린 시절에서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는 골드만의 성격을 고쳐놓겠다고 채찍질을 가했는가하면, 열다섯밖이었던 골드만을 강제로 시집보내려 하기도 했다. 골드만이 이를 거부하며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자는 많이 배울 필요가 없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가 배워야 하는 건 생선 요리를 할 줄 알고 국수를 잘 뽑고 남자에게 많은 아이를 낳아주는 일 뿐이야.” 하지만 결국 골드만의 가족은 골드만과 같이 유별난 아이가 미국으로 가겠다는 것을 말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로체스터에 자리잡은 이복언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무 연고도 없는 러시아 유대인으로서, 골드만은 낙원으로만 알고 있었던 미국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큼은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금새 깨달았다. 재봉사로 일했던 그에게 빈민촌과 공장은 진정한 학교가 되어주었는데, 젊은 시절에 겪은 어려움 덕분에 골드만은 더욱 정의감이 투철하고 자유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골드만을 처음 미국의 아나키즘으로 이끈 것은 1886년에 시카고에서 일어난 헤이마켓 사건이었다. 이는 네 명의 아나키스트가 여덟 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가두시위에서 경찰에 폭탄을 던졌다는 누명을 쓰고 교수형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들을 사건의 주모자로 기소한 증거는 빈약하기 그지 없었는데, 당시에 재판을 맡았던 판사는 대놓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당신들이 재판을 받는 이유는 헤이마켓에서 폭탄을 투척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곧바로 엄청난 분노의 물결을 일으켰고, 급진적 의식을 가진 세대를 형성했다. 골드만 또한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총체적인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된다. 아나키스트들이 교수형 당하던 날, 골드만은 처형당한 순교자들이 가졌던 이상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알아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혁명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골드만은 외로움 때문에 만나서 결혼했던 러시아계 이민자와 이혼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이자 독일어로 쓰인 아나키스트 신문 ‘프라이하이트(Freiheit, 자유)’의 편집자 요한 모스트(Johann Most)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골드만은 폭력 혁명을 주창하는 모스트의 공산주의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이윽고 골드만은 직접 아나키즘에 관한 강연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모스트의 파괴적인 분노에 대해 거리감을 느낀 골드만은 프라이하이트의 경쟁 언론사였던 ‘디 아우토노미(Die Autonomie, 자율)’에 끌리게 되었다. 디 아우토노미를 통해서 골드만은 크로포트킨의 저술을 접하게 되었는데, 골드만은 크로포트킨을 읽자마자 바로 그가 가장 선명한 사유를 펼치는 아나키스트라고 느꼈다. 


골드만은 이론에만 안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유연애에 관한 관점을 견지하면서, 골드만은 아나키스트였던 알렉산더 버크먼(Alexander Berkman)과 연인이 되었는데(골드만의 자서전에 사샤(Sasha)로 지칭되는 이가 바로 버크먼이다), 이것이 바로 평생에 걸쳐 이어진 인연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동료였던 예술가 모데스트 슈타인(Modest Stein, 페디아(Fedya)라고 불렸다)과 함께 셋이서 한집 살림을 했으며, 질투를 느끼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하고 소유하려는 낡아빠진 태도라고 여겨 지양하였다. 


노동자의 권익 신장을 위해 극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기려는 열망에서, 골드만은 버크먼과 함께 1892년 플로리다주 홈스테드의 철강 노조가 파업을 할 때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 1849-1919, 미국의 철강 사업가. 노조 파괴자로 유명하다 - 옮긴이)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골드만은 총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맨하탄 14번가의 사창가에서 일하려고까지 했으나 결국 언니에게 돈을 빌렸다. 


버크먼은 프릭의 사무실에 들어가서 그를 쏘는 데에 성공했는데, 프릭은 부상을 당하기만 한다. 버크먼은 22년형을 선고받았고, 골드만은 암살을 시도한 이유를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정당화하고자 노력했다. 이 재판으로 아나키즘에 관한 인식은 더욱 폭력과 결부되었으며, 골드만은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이때부터 골드만의 강의는 정부 당국에 의해 방해받기 시작했다. 한편 모스트는 버크먼의 행동을 비난했는데, 이에 골드만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채찍을 꺼내들고 모스트를 힘껏 내리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893년에 골드만은 실업자들에게 ‘완력을 사용하여’ 빵을 취하라고 촉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블랙웰스섬의 감옥에서 1년간의 수감 생활을 선고받았다. 재판장에서 검사는 골드만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관해 질문한다. 

골드만 씨,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아니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 당신이 찬성하는 법을 가진 정부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모든 정부는 인민의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 나라를 떠나지 그러십니까?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세상 어떤 법도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보고 천국에 갈 수 없다고들 하는데 저 또한 거기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확실히 그의 답변은 존경받는 재판관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형기를 마치고 세상에 다시 나와 보니 골드만은 악명 높은 ‘빨간 엠마’라는 이름으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가 자유연애와 무신론, 그리고 혁명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고  두려움 또한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는 않았다. 1897년에 「레이버 리더」(Labor Leader, 1891년 런던에서 창간된 노동 주간지 - 옮긴이) 편집자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에 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골드만은 단순하게 대답했다.  “저는 정말로 지나치게 아나키스트라 그러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위한 계획안을 실행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계획의 사소하고 세세한 사항들을 신경쓰지는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자유입니다. 저 자신과 모두를 위한 무제한적이고 완벽한 자유야말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젊은 폴란드계 이민자 촐고츠(Leon Czolgosz, 1873-1901)가 매킨리 대통령(William McKinley Jr., 1843-1901,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 옮긴이)을 암살했을 때 촐고츠에게 암살을 교사한 사람이 골드만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골드만은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했지만, 자신을 보호할 길 없는 암살자 촐고츠에게 그가 공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대중에게 골드만이 위험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심어주었다. 이윽고 아나키스트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문에 골드만은 190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적인 생활을 다시 할 수 있었다. 


골드만이 버크먼과 함께 「어머니 지구」(Mother Earth)라는 월간지를 발간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이 잡지는 원래 월트 휘트먼의 시 제목을 따서 ‘열린 길(Open Road’)이라고 불렸었는데, ‘어머니 지구’라는 제목은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과 자유의 아름다움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더 적절해 보였다. 이 간행물은 단순히 아나키즘 사상을 다루는 것을 넘어 헨리크 입센과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 프리드리히 니체, 오스카 와일드와 같은 작가들을 미국 대중들에게 소개하며 문예지로도 자리매김했다.

 


수정 (20210103) 골드만이 주장한 것은 국가에 의한 산아 제한이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 피임 등을 통해 임신을 조절하는 것이므로 '산아 제한'을 '임신 조절'로 정정합니다. (첫번째 문단: "선구적으로 산아 제한을 역설하고" ▶ "선구적으로 임신 조절을 역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