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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피터 마셜 『불가능을 요구하라』24. 엠마 골드만 (5) 골드만의 성 정치학

서서재 2021. 1. 4. 18:31

엠마 골드만의 성 정치학


정부와 혁명, 그리고 교육에 관한 골드만의 주장들은 누구나 수긍할 정도로 명확하고 통찰력 있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적 차원을 도입함으로써 아나키즘 이론에 큰 기여를 남겼다. 골드만은 동시대 여성의 지위와 삶의 조건에 대해 특별히 큰 분노를 느꼈고, 이에 관해 직설적인 관점을 취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양성 간의 관계에 만연한 이중 잣대가 끔찍하다고 생각했으며, 자연스러운 충동을 폄하하고 문화를 위축시키는 ‘청교도주의의 이중성’을 공격했다. 또한 골드만은 여성을 성적 상품이나 아기를 낳고 기르는 존재나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하는 현존 체제에 대해서도 매서운 비판을 가했다. 이 중에서도 그가 여성 착취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은 것은 성매매였는데, 그는 모든 여성이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몸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보았다.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개인적인 것에 더 강조점을 두었던 골드만은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에게서 떨어져 고립되었지만, 이 덕분에 골드만은 70년대와 80년대에 미국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특별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여성 또한 남성을 제약할 힘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투표를 여성 해방의 제1 수단이라고 여겼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과 달리, 골드만은 보편 선거권이 전적으로 ‘근대의 페티쉬’에 불과하다고 보아 참정권 운동에 수긍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에 미국에서의 참정권 운동이 사람들의 경제적 필요에서 괴리된, ‘하나같이 팔자 좋은 소리(a parlor affair)’라고 일축했다. 해방의 진정한 목표는 여성이 온전한 의미에서 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했으나, 보편 선거권 운동이라는 이른바 ‘여성 해방이 처한 비극’ 앞에, 골드만은 고립된 채로 무늬만 페미니스트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골드만은 동료 자매들이 당시에 이해되던 방식의 ‘해방’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골드만이 보기에 ‘미국의 자유 시민’은 선거권을 통해 단순히 ‘자신의 팔다리를 옭아맬 쇠사슬을 짠’ 것에 불과했다. 그는 남성이 가지고 있는 투표권을 여성이 갖지 말아야 할 이유 또한 없다고 여겼지만, ‘남성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여성은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골드만은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면 자유주의 정치 체제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이 여성을 신격화하거나 신비화하는 것으로서 여성 억압적 시선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았다 - 옮긴이]


양성 간의 불평등하고 억압적 관계는 정치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골드만은 노예적 경제 체제의 철폐와 더불어 니체적 ‘가치의 전도’를 통해 모든 인정된 가치를 뒤집을 것을 역설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선악의 저편’으로 함께 넘어가서 ‘자기 자신의 몸과 정신의 주인이 될 권리’를 쟁취하자고 말했다. 진정한 해방이 시작되는 곳은 투표소도 법원도 아니다. 골드만은 진정한 해방이 바로 ‘여성의 정신’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여성 해방은 무엇보다도 여성에게서 여성을 통해 온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성적 상품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관철하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그 누구의 권리도 거부하는 것이다. 스스로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이를 가지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신, 국가, 사회, 남편, 가족 등의 하인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삶을 더 단순하면서도 더 깊이 있고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모든 복잡다단함 속에서 산다는 것의 본질과 의미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비난하는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 투표가 아니라 — 여성은 자유로워질 것이며, 이 세상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위한 힘, 자유로운 남녀를 창조하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은 성스러운 불꽃 같은 힘 말이다. 


골드만은 가장 금기시되는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고, 섹스와 사랑과 결혼에 관해 솔직하고 개방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사랑과 결혼이 동의어이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배타적일 때가 많았다. 여태까지 사랑은 인습의 사슬을 끊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던 반면, 결혼은 국가와 교회가 개인의 가장 내밀한 영역까지 파고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많은 경우에 결혼은 여성에게는 보험을, 남성에게는 예쁜 노리개와 계속해서 자손을 남길 수단을 제공해주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계약이었다. 이러한 것으로서의 결혼은 ‘여성에게는 의존적이고 무력한 하인의 기생하는 삶만을 남겨놓은 반면 남성에게는 한 사람의 삶을 담보로 잡을 수 있는 권리를 안겨줬다.’ 따라서 남성의 지갑이 아닌 심장과 마음에 있는 것만을 보고 그를 높게 평가할 수 있을 때 여성은 자신을 해방하고 아무 제약 없이 그 사랑을 좇을 권리를 얻게 되며, 자유로운 모성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선언하게 된다. 고드윈을 제외하면 그때까지 어떤 아나키즘 사상가도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결혼이라는 시장’에 대해 이만큼 통렬한 비판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