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국내 미번역 외서 리뷰 (검토서)

[번역] 피터 마셜, 『Demanding the Impossible』0. 서론 (3)

서서재 2021. 1. 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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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피터 마셜, 『Demanding the Impossible - A History of Anarchism』0. 서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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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본적으로 아나키즘 사상과 운동에 관한 비판적인 역사서이며, 아나키즘의 기원과 발전사를 고대 문명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추적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특정 사상가들을 살펴보게 될 텐데, 이때 그들의 텍스트를 자기 완결적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각각의 사상가와 그들의 작업을 폭넓은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볼 것이며, 역사적 맥락과 사상가의 개인사적 맥락 속에서도 그 내용을 짚어볼 예정이다. 


어디에서 연구를 시작해서 누구를 포함할 것인가 하는 데에는 물론 논쟁의 여지가 있다. 누군가는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라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지칭했던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에서 시작해서, 그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라는 이름표를 내건 후대 사상가들로 대상을 한정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으로 대상을 정한다면 뛰어난 아나키즘 사상가라고 일컬어지는 고드윈이나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부르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던 톨스토이(그의 시대에는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폭력이 연상되었기 때문)를 제외하게 될지 모른다. 또한, 주요 사상가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그들의 삶을 일부분만 포함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프루동의 경우 말년에 접어들수록 아나키즘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였으며,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은 원숙기가 되어서야 아나키즘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나는 아나키스트를 지역 공동체의 내부에서 비롯되지 않은 모든 형태의 외적 정부나 국가를 거부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적·개인적 삶이 그것들 없이도 잘 기능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한편 리버테리언은 자유(liberty)를 최상의 가치로 삼고 정부의 권력이 치안이 유지될 수 있는 수준에서만 최소한도로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이다. 아나키스트와 리버테리언을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으며, 과거에는 두 용어가 자주 섞여서 쓰였다. 물론 모든 아나키스트가 리버테리언일지라도 모든 리버테리언이 아나키스트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사상은 같은 조상을 공유하는 친척으로서 서로 닮은 점이 많으며, 종종 생산적인 연합을 결성하기도 한다. 


크로포트킨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1910)의 아나키즘 항목에 아주 유명한 글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그는 아나키즘적 ‘경향’을 고대의 노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고 있다. 나는 이 연구에서 크로포트킨의 선례를 따랐다. 아나키즘은 19세기에 누군가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겠다고 결정하고 나서야 갑자기 등장한 사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아나키즘 전통의 적통(嫡統)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나는 또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이 ‘자유가 남긴 유산’이라고 불렀던 것을 발굴함으로써 과거에 권위주의적 주류 문화 아래 가려지거나 위장되었던 리버테리언 사상의 흐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나는 연구의 대상을 사상가로 한정했다. 그래서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같은 시인이나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B. 트라벤(B. Traven), 어슐러 르 귄(Ursula K. LeGuin)과 같은 소설가는 깊이 있은 아나키즘적 감성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제외되었다. 또한 풍부한 내용을 자랑하는 아나키즘 예술도 간단하게만 언급되었다. 내가 이러한 선택을 내린 이유는 아나키즘 철학이 얼마나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지를 보여주고 아나키즘 사상이 일류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했다는 일반적인 편견을 타파하는 것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일차적인 동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나키스트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행동에 옮겼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에서 아나키스트 사상가들과 그들의 생각은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조명될 텐데, 무엇보다도 나는 독창적이고 깊이 있는 생각과 가치의 보고(寶庫)인 아나키즘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강조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역사서로서뿐만 아니라 철학서로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정치적 선전물을 쓸 생각으로 이 책을 집필하지는 않았지만, 아나키즘에 공감하는 나의 마음이 책에 묻어 있으리라 의심해 마지않는다.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어떤 경험을 하는 데에 자유를 향한 열망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인간 본연의 욕망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데에는 자유가 꼭 필요하다. 어떤 동물도 우리에 갇혀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의식을 가진 존재라면 모두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충족할 수 있을 때 즐거움을 느낀다. 따라서 자유는 자연적인 욕망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연에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사회적 삶 안에서도 찾고자 한다. 자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자연이 스스로 활동을 조절하고 자기 자신을 조직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아나키즘을 적대시하는 이들로부터 아나키즘은 미성숙하고 터무니없는 사상이라고 치부되어 왔다. 권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레닌의 말을 반복적으로 읊으면서 아나키즘을 다른 종류의 “좌익 공산주의”와 함께 “소아병”으로 깎아내렸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본능적 충동을 극도로 억압해야만 문명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조주의적 프로이트주의자들과 잘 어울린다. 그들에 따르면 아나키스트들은 부모의 권위에 대한 증오를 국가에 투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진지한 윤리·사회적 철학인 아나키즘은 올바르게 해소되지 못한 존속살해 욕구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되거나 소아기 신경증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일종으로 치부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아나키즘이 철학적 엄밀함이 떨어져서 기본적으로 감정에 호소하기만 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만약 이러한 비판이 옳다면 버트런드 러셀이나 노엄 촘스키와 같이 금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들이 아나키즘 철학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더라도 왜 그다지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아나키즘이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 대해 논리적이고 의미 있는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20세기에 아나키즘이 어떻게 사회 운동으로서 그렇게 폭넓은 영향을 끼쳤는지(특히 스페인에서) 설명하기 어렵다. 아나키즘은 유토피아적이거나 원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나키즘은 발달한 산업 사회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농경에 기반한 사회에서도 개인과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며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씨름한다. 


아나키즘이 끊임없이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우리는 우리 안에 깊이 내재해 있는 이성적·감정적 충동과 아나키즘이 쉽게 어울릴 수 있다는 변치않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아나키즘은 사회 철학일 뿐만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이자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은 현존하는 제도와 관행에 관한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공하며, 그와 동시에 급진적으로 바뀐 사회에 관한 전망 또한 제공해준다.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은 개인과 사회의 자유가 실현된 매혹적인 이상을 떠받치고 있다. 이는 두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이 둘은 각각 모든 외부로부터의 제약과 강제적 권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과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조화롭게 한껏 만끽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이 미래에 어떤 성공을 거두든지 간에, 아나키즘은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부분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 꿈틀대는 자유를 향한 열망이야말로 가장 깊은 내면의 요구이며 자유로운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어떤 것도 완벽하게 억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열망은 모든 지배자와 그들의 국가보다 이 세상에 더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서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