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국내 미번역 외서 리뷰 (검토서)

[번역] 피터 마셜, 『Demanding the Impossible』0. 서론 (2)

서서재 2020. 12. 30. 18:38

(1)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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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피터 마셜, 『Demanding the Impossible - A History of Anarchism』 0. 서론 (1)

서론 ‘아나키즘은 테러리즘이다. 문명사회를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불한당들은 아나키즘을 믿는다. 아나키즘은 혼돈을 불러온다. 이 상태에서 법과 질서는 무너지고 인간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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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이어 그들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모든 가치와 사상을 응축한 아나키즘이라는 화산은 꺼진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전에 없었던 방식이자 이전보다 분산된 형태이기는 했지만, 60년대는 아나키즘의 놀라운 부활을 목격했다. 아나키즘의 핵심적인 관심사는 당시 신좌파의 주제(탈집중화, 노동자에 의한 통제, 참여 민주주의)로 수용되었다. E. P. 톰슨과 같이 사려 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위 정당의 권위주의적인 전략과 거리를 두기 위하여 자신들을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개인성과 공동체, 그리고 즐거움에 기반하여 기성 문화에 저항하는 흐름의 성장은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는 못했더라도 전적으로 아나키즘적인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불가능한 것을 현실적으로 요구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상명하복식으로 로봇처럼 움직이는 기구들과 직업 정치인들이 밥 먹듯이 하는 거짓말, 그리고 회색빛의 단조로운 노동에 지쳐 있던 중산층 젊은이들은 런던과 파리, 암스테르담, 베를린, 시카고, 멕시코 시티,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리고 도쿄에서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아나키즘의 검은색 깃발을 들어 올렸다. 파리 거리를 장식한 포스터에는 “현실적인 것을 요구하라. 불가능을 요구하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상상력을 꽃피워라”와 같이 역설적인 구호가 적혔다. 상황주의자들은 일상의 변혁을 부르짖었다. 네덜란드의 아나키스트 단체 프로보(Provo)는 카부터스(Kabouters)로 이어지며 창조적 저항의 전통을 실천했다. 이 시기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봉기와 저항은 중앙집중화된 근대 국가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주었다. 


여기에 역사가들은 주목했다. 다니엘 게랭(Daniel Guérin)이 활기넘치는 필치로 작성한 『아나키즘 - 이론에서 실천까지』(1965)는 1960년대에 성장하던 리버테리언 감수성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것이 더욱 발전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게랭은 오늘날 시대의 요구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아나키즘이 아니라 국가에 기댄 공산주의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68년에 프라하의 봄과 파리 혁명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예측이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고 확신했다. 섣불리 아나키즘의 실패를 선언한 바 있었던 졸은 아나키즘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단순히 인간 심리를 탐구하거나 지나간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키즘에는 더 가망이 없다고 이야기했던 우드콕 또한 자신이 너무 성급한 단정을 내렸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아나키즘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아나키즘은 “사막에서 각성하여 깨어난 불사조”가 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일상의 변혁이 70년대에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아나키즘의 영향력은 삶의 면면을 장악한 국가 안에서도 자유로운 삶의 지대를 만들어 내고자 노력한 많은 유럽 및 북아메리카 공동체 실험에서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생산수단을 노동자가 직접 통제하며 관리할 것을 부르짖은 운동에서는 초기 아나코-생디칼리즘의 원칙들이 메아리쳤다. 평화 운동과 여성 운동은 타인을 지배하고 위계를 세우는 것에 대한 아나키즘의 비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아나키즘이 강조해 마지않았던 직접 행동과 참여 민주주의의 원리를 다양한 정도로 수용했다. 녹색 운동은 경제를 탈집중화하고 개인과 정치 시스템이 가진 권력을 해체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적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교육과 노동조합, 공동체 계획과 문화 부문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최근에 국가가 점점 더 군사화되고 중앙집권화되면서 더욱 비밀스러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권위에 도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할 것을 역설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항하여 저항 운동을 벌였다.


아직 남아 있는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정권에서는 자치와 기본적 자유에 대한 요구가 널리 퍼져 있다.  예전에 소련에 속해 있었지만 지금은 독립국이 된 나라들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다시 한번 의제로 떠올랐으며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은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처음으로 읽고 있다. 1989년 5월에 중국에서 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났던 시위는 탱크가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비폭력 직접행동의 창조적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아나키스트 전선에서 노동자가 자율적 조합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산을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더욱 불을 지폈다. 


서양에서는 우파에 속하던 이들 또한 영감을 얻으려고 아나키스트 사상가들의 저술로 눈을 돌린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경제 규제 철폐와 정부 개입 근절을 골자로 하는 ‘아나코-자본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실제로 이들이 한 것은 정반대였지만,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국가의 외연을 좁히’고자 하였으며,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정부라는 등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어 했다. 이러한 구상을 더욱 멀리까지 밀어붙인 ‘리버테리언당’은 1980년대에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정당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