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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피터 마셜, 『Demanding the Impossible』 0. 서론 (1)

서서재 2020. 12. 29. 17:59

 

서론


‘아나키즘은 테러리즘이다. 문명사회를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불한당들은 아나키즘을 믿는다. 아나키즘은 혼돈을 불러온다. 이 상태에서 법과 질서는 무너지고 인간의 파괴적인 성향은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아나키즘은 허무주의다. 모든 도덕적 가치와 어둠을 비추는 이성은 아나키즘 때문에 폐기된다.’ 


이것이 법관과 정부 각료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아나키즘이라는 유령이다. 사람들의 상상과 일상의 언어 속에서 아나키즘은 파괴나 불복종과 연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압의 해소와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연상되고 있다. 여기서 아나키스트는 난폭하게 공공 기물을 때려 부수고 성상을 파괴하는 사람이나 온갖 난폭하고 야만스러운 신화 속 짐승들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는 소설 『비밀 요원』(1907)에서 아나키스트를 정부와 문명사회를 무너뜨리려는 광신도로 묘사하기도 했다. 


놀라울 것도 없이, 아나키즘은 미디어에서도 좋지 못한 평을 들어왔다. 순수한 자유를 추구하는 아나키즘의 이상을 좋게 말해서 유토피아적이라고 하고 나쁘게 말해서 실현 불가능하고 위험한 공상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한쪽에서는 아나키스트를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미친 사람이나 융통성 없는 극단주의자, 위험하기 그지 없는 테러리스트로 깎아내리고, 한쪽에서는 아나키스트를 순진한 공상가나 고상한 성자로 치부한다. 19세기의 말엽에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선언하기도 했다. “아나키즘은 인류에 대한 범죄이며 모든 인간은 아나키즘에 대항하여 뭉쳐야 한다.”


그러나 사실 혁명 전략의 일환으로서 테러를 행한 사람은 아나키스트 중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시기 또한 주로 1890년대에 해당한다. 당시에 규모 있는 폭발과 정치인 암살이 터져 나온 것은 그 시기에 그야말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만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아나키즘은 폭력과 함께 결부되는 경우가 많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정치적 교의들보다 훨씬 폭력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아나키스트는 떼로 뭉쳐서 진군하는 파시스트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앞길에서 밀려난 연약한 젊은이처럼 보인다. 아나키즘은 폭력을 독점하지 않으며, 민족주의자나 포퓰리스트, 군주주의자와 비교하면 훨씬 평화적이다. 더 나아가, 아나키즘의 전통은 고드윈이나 프루동, 크로포트킨, 톨스토이와 같이 생각이 깊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포괄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테러리즘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전적인 아나키스트 사상가 중에서는 바쿠닌만이 파괴의 미학을 긍정했으며, 이는 그가 다른 많은 사상가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것을 우선 파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언어와 문화는 권력자의 가치와 사고를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껏 아나키스트는 틀에 박힌 말의 의미가 휘두르는 폭정에 희생당했으며,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이 ‘말로 쌓은 감옥(Bastille of the word)’이라고 불렀던 것에 붙잡혀 있었다. 하지만 왜 통치하는 자들이 아나키즘을 두려워하며 아나키스트들에게 파괴를 일삼는 광신도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싶어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이유는 아나키스트가 통치의 근본 그 자체를 문제삼기 때문이다. 아나키(anarchy)라는 말은 ‘지도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키아(ἀναρχία)에서 왔는데, 이는 보통 ‘지배자가 없는 상태’라고 번역되고 해석된다. 태고부터 지배자들에게는 신민들에게 자신의 지배가 없으면 혼란이 가득한 아수라장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러한 태도는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시구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네. 중심이 서 있질 못하네. 완전한 아나키가 세상을 뒤덮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법을 손에 쥐고 있는 이들은 ‘무법 상태’가 혼란과 방종, 폭력을 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질서와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법과 정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가와 정부가 이론적으로만 부정의를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뿐 실제로는 억압과 불평등을 영속시키기만 했다는 사실이 독립적으로 대담한 사고를 전개하는 이들의 눈에는 갈수록 분명하게 보였다. 이들이 보았을 때 법과 법원, 감옥과 군대와 같이 강압적 수단을 가진 국가는 무질서를 해결하는 치유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질서의 주요 원인이었다. 이처럼 정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사상가들은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각을 세상에 꺼내 놓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바로 지배자가 없는 사회가 마구 날뛰는 무질서 상태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잡힌 인간 실존의 가장 바람직한 형태를 창출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연 상태’ 혹은 무정부 상태가 홉스(Thomas Hobbes)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서로에 대해 맞서 싸우는 영원한 전쟁 상태가 되라는 법은 없으며, 오히려 무정부 상태는 평화롭고 생산적인 삶이 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이는 실제로는 로크(John Locke)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 더 가까워 보일 것이다.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이 완벽한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자신들의 행동을 질서 있게 조직할 수 있는 상태 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모두의 머리 위에 자리하는 사람 없이도 권위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가름해 주는 이성에 따라 살 수 있다. 로크의 주장에서 아나키스트는 단지 삶을 즐기고 무언가를 소유하는 일이 자연 상태에서는 불확실하거나 불편할 것이라는 부분에 반대할 뿐이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칭했던 피에르-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이러한 이유에서 “아나키는 질서다”라는 역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말에 담긴 혁명적 중요성은 그 이후로 계속 메아리치며 반복됐다. 자신들이 모두 쓸모 없는 존재라는 것이 들통날까봐 이 말을 들은 통치자들은 벌벌 떨 수밖에 없었고, 지배받지 않고 자유로운 시대를 상상하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희망을 얻었다.


이때까지 아나키즘 운동은 20세기에 있었던 두 번의 주요 혁명 — 러시아 혁명과 스페인 혁명 — 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러시아 혁명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라는 슬로건에 담긴 의미를 진정으로 실현하고자 하였고 많은 지역,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자유로운 코뮨을 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으면서 아나키스트는 점점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붉은 군대의 수장이었던 트로츠키는 네스토르 마흐노(Nestor Makhno, 1888-1934)가 이끌었던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운동을 짓밟았고, 그런 다음 1921년에는 수병과 노동자가 들고일어난 마지막 대규모 리버테리안 봉기였던 크론시타트(Kronstadt) 봉기 또한 진압했다. 


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스페인에서는 1930년대에 가장 큰 규모의 아나키스트 실험이 일어났다. 스페인 내전 초반에 소작농, 특히 안달루시아와 아라곤, 발렌시아의 소작농들은 수천여 개의 마을에서 열성적으로 집산주의 공동체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발달한 산업 지역인 카탈루냐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들이 직접 자신의 일을 결정한다는 원칙에 따라 노동자 집산 공동체를 바탕으로 산업 시설을 관장했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카탈루냐 찬가』(1938)를 써서 당시의 혁명 분위기에 대한 눈부신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파시즘에 잠식된 이탈리아와 독일이 프랑코(Francisco Fraco, 1892-1975)와 그 도당의 편에 붙어서 혁명에 개입하였고, 소련이 제한적인 무기를 공산주의 국가에 집중하여 공급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 아나키스트 실험이 불운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7년 바르셀로나에서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들은 서로 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코는 승리를 거뒀다. 그에 따라 수백만 명의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갈 길을 잃게 되었다. 


머지않아 일어났던 2차 세계 대전으로 국제 아나키즘 운동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당시의 아나키즘 운동은 가장 헌신적인 활동이라고 해봐야 작은 잡지를 발행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기록하는 일이 전부였다. 시민 불복종을 기치로 인도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자치 마을을 중심으로 한 탈집중화된 사회를 역설했던 간디(Gandhi)만이 리버테리언의 이상에 희미한 빛을 비춰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1960년대 초에 아나키즘의 역사에 관한 책을 집필한 조지 우드콕(George Woodcock, 1912-1995)은 아나키즘이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살펴보고 목표를 돌아보게 해줄’ 원리라고 평가하면서도 아나키즘 운동에는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는 슬픈 결론을 내렸다. 이에 뒤이어 역사가 제임스 졸(James Joll) 또한 씁쓸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중요한 정치·사회적 원동력’으로서의 아나키즘 운동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한편 사회학자 어빙 호로비츠(Irving Louis Horowitz)는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나키즘이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곧이어 그들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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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피터 마셜, 『Demanding the Impossible - A History of Anarchism』0. 서론 (2)

(1)에서 계속 그러나 곧이어 그들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모든 가치와 사상을 응축한 아나키즘이라는 화산은 꺼진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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