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철학과 기술 - 잡다한 실험들/etc

[BA8] 20191128 학교 심리상담 센터에 다녀왔다 (+9)

서서재 2020. 2. 10. 22:52

20191128

군복무를 하는 동안 항상 군화를 신고 있어서 그랬는지 뒤꿈치에 습진이 생겼었다.

전역해서 군화를 벗으면 나을 줄 알았는데 잘 낫지 않았고, 

그렇게 미련하게 몇 년을 가지고 있다가 최근에야 여유가 생겨서 피부과에 갔다. 

처방받은 크림을 아침저녁으로 일주일 정도 발랐더니 감쪽같이 나아서 

'왜 이제야 왔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방식으로 우울증도 병원에 안가고 혼자서 끙끙 앓고만 있었던 것 같다. 

약이라도 먹었으면 그동안 조금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고집부리면서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다가 망가뜨린 것, 공허하게 되어버린 시간들이 많다. 

 

우울증도 감기처럼 약먹으면 낫는다고 하던데,

사람 마음에 관한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싶지만,

그래도 호르몬이라도 조금 컨트롤이 된다면 그 지반 위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에너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물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성격이나 감정, 사회적인 문제를 설명하는 시도들이

개인의 문제를 사회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깊게 이해하고 공감하기 보다는 

대충 싸게싸게 처방을 내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거리를 두어 왔는데,

지금은 고집을 내려놓아야겠다.

 

좀 더 건강한 상태에서 그곳에 갔더라면 좋았을텐데.. 

특히 마지막 몇 주 동안 완전히 판단력을 잃어버려서 

길 위에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또 너무 많은 상충되는 것들을 동시에 결정해서

엄청 많은 돈을 순식간에 증발시켜버리는 상태까지 치닫았던 것을 생각하면

나는 정말로 정상이 아니었고, 지금도 한국에 돌아왔다고 해서 정상이 된 것 같지 않다. 

 

미련하게 혼자 자가치유하지 말고 이제는 정말 병원에 가야겠다.

 

미련한 나, 화이팅...

20191202 

너무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을 핸드폰에 의존하면서 보내는 것 같다. 볼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튜브-웹툰-인스타-카톡-음악앱의 고리 속을 계속 헤매인다.

긍정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무료함이나 결핍의 부재로서의 부정적인 지위만을 가지는, 오늘날 즐거움이나 쾌락이라는 개념으로 온전히 표현되지 못하게 된 것을 넘어 아예 하나의 감정으로 자리매김해버린 그러한 비-불쾌감은 나로하여금 사람과의 내밀한 관계를 맺거나 사태에 깊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이것도 중독인 것 같아 당분간은 핸드폰을 안 들고 다니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부재한 자리를 뭔가 좀 더 건강한 습관들이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0191204

6년째 단골로 가던 최애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고 카페와 연결되어있는 빈티지 수입가구 매장에서 일을 하게됐는데 맨날 집과 학교만 오가며 혼자 밥먹고 철학책만 읽다가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니 다시 활력이 조금 생기는 것 같다. 

 

20191212

상담센터에서 접수상담을 하고 왔다. 대기자가 많아서 본격적인 상담은 한달정도 뒤에나 시작될 수 있다고 한다.

 

20191227

계속 바쁘고 결정해야할 것이 많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생각하고 싶다. 

 

20200107 

언제쯤 상담센터에서 연락이 올까.. 

 

내가 가장 중독적으로 매일 반복해온 것을 끊은지 오늘로 일주일이 되었다. 

중독 행위를 할 때의 도파민 과다 분비는 여타 상황들에서 도파민에 무감각해지게 만들어서 의욕상실을 낳는다는데, 이게 강박적인 성격이 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호르몬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다. 무작정 극기로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상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약간이라도 인내를 더할 수 있겠지..

 

20200108

육지에는 바다보다 600배나 되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 사실 그 격차는 주로 식물로 인해 생겨난다. 바다의 평균적인 식물은 약 20일 정도 사는 단세포 생물이다. 육지의 평균적인 식물은 100년 넘게 사는 2톤짜리 나무다. 바다에 사는 식물과 동물의 질량비는 4에 가깝지만, 육지에서는 그 비가 1,000에 달한다. 식물의 개체 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미국 서부의 보호림 안에만도 800억 그루의 나무가 산다. 미국 내 나무와 사람의 비는 200을 훨씬 넘는다. 사람들은 보통 식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그것을 잘 보지 못한다. 이 숫자를 알고 난 후 내 눈에는 식물 말고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랩 걸Lab Girl』, p.9)

식물을 가까이하고 식물과 함께 사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반대로, 식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는 사람은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만 말하게 될까. 식물을 잊는다는 것은 무엇을 잃어버리는 일이 될까. 문득 학기 중에 조금밖에 펼쳐보지 못한 <육식의 종말>에 육식과 성차별주의의 관계를 다룬 챕터가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내일모레 방학하고 나면 그때는 제대로 시간을 내서 읽어봐야겠다..

 

20200116/18

제법 활기를 회복해서 충만하게 보낸 것 같은 하루라도 결국은 어마어마한 원금에 붙은 그날의 이자를 갚은 것에 불과한게 아닐까. '이제 나는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고서도 줄어들지 않은 원금의 무게 때문에 금방 다시 무기력해지고 궁해지는 게 아닐까. 그날그날 나를 낫게 해줄 장소와 책 등등을 찾아 헤매는 것은 어쩌면 오랫동안 차근차근 빚을 갚는 대신 한탕을 꿈꾸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거나, 매일 새로운 빚을 내서 빚을 막는 것은 아닐까. 나한테 절박한 것은 휴식이라는 핑계로 밑도 끝도 없이 나태해지는 것을 정당화하고, 누군가 내 빚을 대신 갚아주기를 기대하면서 살고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다른 이를 대하는 태도도 한결같지 않고 충동적이고 기복이 심한 것 아닌가. 사랑을 받지 못해서 힘을 낼 수 없다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사랑을 받을 준비도 안되어있어서 받은 사랑마저도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 휴식이 절박하다고 느끼며 계속 쉬려고 하고 편한 곳을 찾아 헤매일수록 정신이 자라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은 당연하다. 휴식은 빚을 내서 그날의 이자를 갚는 것이고, 타인의 인정이나 사랑을 능력발휘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남의 돈을 꿔야만 일을 할 수 있다고 버팅기는 것이나 다름 없다. 원금을 갚아나가려면 기껍지 않은 일들을 해야하고 남이 대신 해주던 것들을 직접해야 하며 불편한 만남들로부터 도망치지 않아야한다. 꾸준히 묵묵히 오랫동안 차근차근.. 

 

20200209

계속 상담 순번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개강이 한 달 연기되었고 면대면 상담프로그램이 모두 취소되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연락을 했는데 답장이 없다.

많이 지쳤다.

 

20200210

/ 며칠 고민한 끝에 대학로 청음샵에 가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질렀다. 소비를 통해 얻는 활기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도움이 된다. 

 

/ 오후에는 텅 빈 극장에 혼자 앉아 마스크를 쓰고 <기억할만한 지나침>을 봤다. 나에게 있는 것들이면서도 일상의 압력 때문에 표면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정서와 기억, 시선들이 잠시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쉴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중력에 의해 계속 아래로 끌어당겨지기만하는 영겁의 시간들과 마침내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순간이 영화에 잘 표현되어있어서 좋았다. 

 

/ ...

 

/ 이번엔 언제부터 우울해졌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 적어본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다. 심해진 것은 요 며칠사이일 뿐이다. 낙담할 필요없다. 최대한 2주가 넘어가지 않도록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