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철학과 기술 - 잡다한 실험들/읽기의 기술

워커홀릭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에 가려진 일중독, 혹은 과잉적응증후군

서서재 2022. 10. 14. 08:47

일하는 것, 혹은 일을 많이/잘 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우리 사회에서 일 중독은 문제적인 증상으로 여겨지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일도 술이나 마약처럼 중독성을 가지고 있으며, 중독자의 일상과 관계를 망가뜨린다. 

일을 즐겁게 하는 것과 일을 중독적으로 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일 중독자는 충분히 일을 많이 하고 성과가 나온 상황에서도 휴식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 중독과 건강의 차이는 ‘현재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미룰 수 있는가?’하는 것인데, 일중독자는 일을 멈추거나 나중에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거식증에 걸려서 수척하게 마른 사람이 자기는 마르지 않았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일중독자도 자신이 일중독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중독 증세>

알콜중독자가 삶이 망가질 때까지 술을 더 많이 마시는 것처럼, 일중독자도 점점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 일중독자는 일을 할 때 에너지와 활력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본인이 좋아하기만 하면 일을 오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일하는 것이 즐겁고 기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오래, 많이 일한다. 알콜중독자가 한 번에 몰아서 과음을 하는 것처럼, 일중독자는 일감이 몰려들 때 쾌감과 자기효능감을 느낀다.

일중독자는 일을 못하게 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하던 일을 중지당할 때 ‘방해 받았다’라고 생각해 언짢아한다. 알콜 중독자가 금주를 못 견뎌하는 것처럼, 일중독자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휴식을 취할 때 죄의식과 함께 불안 증세와 상실감을 보인다. 이들은 휴식을 취하겠다고 하면서도 휴식 장소에 일감을 가져가 ‘즐겁게’ 일을 하며 자신에게는 그것이 휴식이라고 말한다. 

<자기 과장적 믿음>

일중독자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장해서 믿고 완벽한 결과물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인다. 일중독자는 “나 말고는 아무도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못한다. 일을 더 많이 하고 성과를 많이 내는 것에 집착하기에 자꾸 여러 가지 일을 한 번에 하거나 동시에 진행시킨다. 자기 자신이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며, 결과물의 무결성에 집착하고 타인의 결과물을 낮추어 본다. 

한편, 일중독자는 자신의 능력을 확대하여 인식하거나 평균적인 능력치의 자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현실적인 시간보다 짧은 시간만 계획에 넣곤 한다. 그는 항상 자신이 일을 평균보다 빨리 끝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목표치를 기준으로 세워놓고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다. 이것이 자발적인 휴식의 반납과 자기 처벌, 혹은 자기 검증으로서의 잔업/야근/추가 노동으로 이어진다. 

일중독자는 자신의 수행한 업무의 공과를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으로 돌리려는 모습을 보인다. 무언가 잘못되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반대로 여러 사람의 기여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도 자신이 열심히 하고 유능해서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든 공을 독식한다. 

 

<타인과의 관계>

일중독자는 자신의 휴식을 위해서 시간을 쓰지 않는 것처럼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도 인색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타인과 관계를 진솔하게 맺기 어려워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가족과 친구, 가까운 사람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일중독자는 대화의 주된 소재가 일에 관한 것이며,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가장 편하게 생각하고 즐거워한다. 일중독자는 가족이나 친구 등과 함께 놀 때보다 일을 할 때 더 즐거움을 느끼고 활력을 얻으며,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가족/연인과의 관계가 망가지거나 소원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결혼 후 한쪽 배우자에게 일 중독증이 있을 경우 이혼율이 40%나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중독자는 일을 할 때 자신을 밀어붙이는 것처럼 타인을 대할 때도 밀어붙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일보다 다른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을 답답해하고 못 견뎌하며, 직장 동료가 업무 이외의 것을 더 우선시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언짢아 한다. 일중독자는 상사의 요구는 잘 거절하지 못하지만, 가족의 요구는 쉽게 거절해 버린다(이는 일중독자가 그들을 권위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해의식이나 피해망상을 가지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가치 판단의 준거를 외부에 두는 경향>

일중독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결과물에 대해서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외부의 인정이나 칭찬에 의해서만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고 어떤 성과가 계속 나와야만 한다. 일중독자는 자신의 가치를 일이 아니면 증명하지 못하며, 자신이 더 유능하거나 일을 빨리, 많이 할 수 있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일중독자는 외부의 인정이나 칭찬이 없으면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역설적인 점은, 그들은 칭찬을 받아도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하는 상대방의 진심이나 안목을 의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자신이 더 나은 성과를 보였을 때에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일 중독자의 내면 심리>

일중독자에게서는 심한 불안감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결과를 얻지 못하면 인생이 파괴되고 실패자가 될 것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그들은 가난이나 인생의 몰락, 타인의 비난/비판, 타인에 비해 뒤쳐지는 것,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것 등에 대해 심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일중독자는 현재의 일이 순조로운데도 미래에 대해 늘 걱정하며, 항상 위기의식을 가지고 산다. 그들에게는 모든 순간이 작은 위기(mini-crisis)이자 관문이며, 모든 일상을 ‘비상 총동원령’의 모드로 살아낸다. 그들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고 부담스러워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충만함을 찾는 것은 일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면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일중독자가 일에 매진하는 이유는 생계 유지나 원하는 물건을 구입하고자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외적인 필요가 아니라 내면의 심리적 기아 상태를 메우기 위해 일을 한다. 일중독자의 성장과정을 보면 주로 자신이 한 일의 결과에 의해 인정이나 칭찬을 받아 온 사람이 많다. 그들은 일의 성과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일이 아니면 자기 존재의 확신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중독자는 자신이 사랑받은 이유가 자신이 한 일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 중에는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거나 자신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결함이 있다고 느껴서 일이나 결과물로 그것을 은폐하거나 극복하려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신이 유능하면 단점이나 결함이 남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일은 ‘안전 보장’의 의미가 있으며, 자기 구원을 위한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IG: @seoseoj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