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15. 슐라이어마허의 '말 잡아 당기기'

서서재 2021. 7. 8. 16:28

근대 철학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신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해석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번역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거나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의 번역론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하는데요, 슐라이어마허의 번역론에는 굉장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서 여러분들께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슐라이어마허가 번역을 '저자와 독자가 중간지대에서 만나도록 도와주는 행위'라고 정의하지 않고 어느 한 쪽을 다른 한 쪽에게 데려갈지 양자택일 하는 행위라고 이야기한 배경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아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와 독자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A라는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저자의 언어 체계에는 있지만 독자의 언어 체계에는 없을 수 있고, 두 사람의 언어 체계에 동시에 X라는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두 사람에게서 환기시키는 심상이 서로 다를 수 있거든요. 이렇듯 저자와 독자의 언어체계가 완벽하게 포개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포개지지 않는 부분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간극이 생기게 됩니다. 어느 한 쪽의 언어체계에 맞추어 번역을 하려고 하다 보면 다른 한 쪽이 희생당하는 결과가 빚어지죠. 

 

말로만 설명하니까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한번 예시를 가지고 이런 딜레마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볼까요? 

 

호머가 사용하는 색상 표현 중 'chlôros'라는 말은 때때로 우리가 초록(예: 건강한 잎사귀의 색)으로 분류하는 색상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지만, 초록색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노랑(예: 꿀)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우리 말에는 이처럼 초록과 노랑을 모두 가리킬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에] chlôros라는 표현을 맞닥뜨린 번역가는 말의 외연을 정확하게 재생산해내고자 이 단어를 '초록이나 노랑'이라고 번역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번역가는 다른 방식으로 원문에 담긴 내연을 희생하게 되는데, 호머에게는 '초록'이나 '노랑'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단지 chlôros라는 개념만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 이처럼 두 언어 사이에 개념적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번역가는 저자의 언어-개념적 세계를 독자에게 가져갈지 아니면 그 반대로 할지 선택해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호머의 chlôros라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번역가는 두 가지 입장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호머의 고유한 언어 체계를 희생하고 그를 독자에게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chlôros가 초록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는 '초록'이라 번역하고, 노랑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는 '노랑'이라고 번역하고, 이도저도 아닌 경우에는 '초록이나 노랑'이라고 번역하는 것이죠. 이 경우에 독자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독서를 이어갈 수 있겠지만, chlôros는 사실 '초록'도, '노랑'도, '초록이나 노랑'도 아니기 때문에 이는 반쪽짜리 이해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번역을 하면서 호머가 의도했던 바가 왜곡되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 슐라이어마허는 번역이 저자나 독자를 다른 한 편에게 데려가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저자가 움직이는 순간 저자가 원래 전달하고 싶어 했던 의미가 파괴되어 버리니까요.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번역은 어쩌면 알아듣고 싶은 것만 알아듣고 못 알아듣겠는 것은 걸러듣는 나쁜 이해를 유발하는 번역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남은 대안은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번역이라고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독자를 어떻게 저자에게 데려갈 수 있을까요? 독자가 저자를 이해하도록 하려면 독자가 쓰는 말을 가지고 번역을 해야 하는데, 느닷없이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말을 만들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슐라이어마허는 한 가지 묘안을 냅니다. 그는 말이란 경직된 것이 아니라 말랑말랑하고 유연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말을 '구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록'이라는 말의 외연을 쭈욱 잡아 당겨서 노란색도 포함하게끔 만들어보자고 제안합니다. 이렇게요. 

 

호머의 chlôros라는 말을 번역해야 하는 번역가는 chlôros와 의미가 가장 가까운 말, 예를 들어 '초록'을 선택한 다음에 번역을 해나가는 동안 '초록'이라는 말이 나뭇잎의 초록색 뿐만 아니라 벌꿀의 노란색을 지칭할 때에도 적용되도록 그 용례를 조정해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번역한다면 글을 처음 읽는 독자가 당황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접근법은 원문에 있는 단어 chlôros를 그때그때 초록이나 노랑으로 바꿔가며 번역하지 않고 일관적으로 한 단어('초록')로 번역할 수 있게 해준다.

 

굉장히 참신한 방법이죠? 이렇게 독자의 언어를 잡아 당기고 늘리고 구부려서 새로운 의미가 담길 수 있게 하는 것을 오늘날의 번역 이론에서는 '이국화/낯설게하기foreignization'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이에 관해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거예요! 오늘은 이미 복잡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으니 슐라이어마허의 번역 전략을 소개한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오늘의 포스트를 닫으면서 이러한 말놀이를 응용한 것처럼 보이는 시를 한 편 소개하려고 해요. 이 시에서 '벌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며 한번 감상해보세요~ 그럼 안녕!

 

홈파티

백인경

한 접시의 호두파이가 구워지는 동안
몇 번이나 더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너는 잔을 높게 들어올린다
할 말이 있는 듯이
혹은 테이블 위를 질주하는 벌레를 본 듯이

이만큼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어
분침과 시침 사이 조각이 조금 더 농밀해지길
나는 초침소리에 맞춰 빈 접시 위로 설탕을 뿌린다
안 보이는 곳의 벌레들이 두근거려 한다

잔을 좀 기울여줄래 내 쪽으로…
우리는 안다 맥주거품은 곧 사라진다는 걸
거품 때문에 못 마시겠다니
거품이 사라지면 버리고 싶을 거면서

너는 자몽 껍질을 깐다
아까 호두를 깨다 다친 손이다

날이 밝으면 쓰레기차가 올 것이다

개수대의 수도꼭지를 틀자
투명한 벌레들이 왈칵 쏟아진다

참고문헌
스탠포드 철학백과, 슐라이어마허, p.p. 21~25
백인경, 「홈파티」, 『서울 오면 연락해』, p.p. 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