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철학과 기술 - 잡다한 실험들/글쓰기의 기술

글쓰기 과제가 죽어도 하기 싫을 때 - 왜,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다시 알아보자

서서재 2019. 3. 17. 08:20

매 학기마다 소논문이나 에세이를 쓰게 되는데, 이 글쓰기 과제가 나를 힘들게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일단 읽어야 쓸 수 있을 것 같고, 시간이 좀 더 주어지면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고, 제출이 얼마 안 남았는데 쓰다가 모르는 부분을 확인하면 스트레스 받고..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은 기한에 닥쳐서 만족스럽지 않은 글을 쓸 때가 많았다.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글쓰기가 더 두려워졌는데, 이번 학기에도 이는 다르지 않았다. 국제관계학 중간과제를 앞두고 특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해외에서 내가 공부한 것을 처음 평가받는 것이었기에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그럴수록 글쓰기의 압박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혼자서 한없이 끙끙대다가 '언제까지 이렇게 끌려다닐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에 해결책을 강구해 보았다. 구글에 '글쓰기'를 검색했더니 『공포를 날려버리는 학술적 글쓰기 방법』라는 책이 나왔다. 약장수 같은 제목이 별로 내공있어 보이지 않아서 넘기려고 했는데, 독일에서 글쓰기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라길래 E-Book을 결제했다. (사실 독일어 원제는 저것보다는 조금 진지한 편이다. 『백지 앞에 겁먹지 않기 - 글쓰기 장벽 없는 대학공부Keine Angst vor dem leeren Blatt - ohne Schreibblockaden durchs Studium』정도로 번역되겠다..)

영미식 글쓰기 전문가들이 기술적인 조언("결론부터 써라, 일단 책상에 앉아라, 명료하게 써라" 등등..)을 중심으로 글쓰기 솔루션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인 오토 크루제(Otto Kruse) 교수는 철학 박사에 심리학 석사를 한 사람답게 대학에서 글쓰기가 가지는 의미와 역할, 그리고 본질을 독자/학생들에게 이해시킴으로써 글쓰기가 주는 거부감과 부담감을 줄이고자 한다. (물론 이 책에는 시기별 계획짜기나 글쓰기의 종류별 접근 방법과 같은 기술적인 조언과 분석들도 많다.) 

아래부터는 책 원문의 문장들을 발췌한 뒤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내 문장들을 섞고 가공(Paraphrase)해서 만든 요약문이다. (이렇게 '베끼기'와 '창작하기'를 섞어 읽은 내용을 정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중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포스팅 해보려고 한다.)



『공포를 날려버리는 학술적 글쓰기 방법』 오토 크루제

많은 대학생들은 처음에 글쓰기를 사람들이 꼭 배워야하는 과제가 아니라 단순히 학교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긴다. 글쓰기를 배우거나 평상시에 글쓰기를 할 시간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전공지식만을 공부하는 것이 틀리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만족스럽지 못한 에세이나 소논문을 쓰느라 공황에 빠진 학생은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할지도 모른다: '공부한 내용을 잘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 알고는 있다. 수업 중에 이루어진 토론과 발표에서 나는 충분히 좋은 성취를 보였으니 나는 글보다 말이 편한 사람인가 보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글쓰기는 막연하게 관습적으로 끼워넣어지거나 교수자의 편의를 위해 여러 평가 수단 중에서 취사선택된 것이 아니라 교수법상의 기능을 분명히 갖고 있다(이 책의 1장에서는 학술적 글쓰기의 기능과 역사를 다룬다). 대학에서의 글쓰기는 지식을 단순히 언어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아이디어, 사실, 의견 그리고 경험을 능동적으로 가공하여 전문지식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때 지식을 평가하고 묘사하는 일이 다른 사람이 생산해놓은 지식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글쓰기를 하기 전까지는 학습한 내용이 '(전문)지식'으로 조직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읽기와 듣기를 통해 얻은 지식들은 아직 상호간의 연결고리가 빈약한 채로 남아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내부에서의 연결고리들이 빈약하여 세부적인 지식들이 서로 차단되어 있다면 불완전하며, 금세 잊혀지고 말 것이다. 세부적인 지식들 간의 시냅스는 완성된 글을 작성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표현을 고르고, 문장의 배열을 바꾸고, 목차를 수정하는 일 등등.. 이것들은 겉보기에는 소모적인 듯 보이지만, 이 과정 속에서 떨어져 있는 지식은 조용하게, 그러나 왕성히 조직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글쓰기는 학습이나 연구로 얻은 지식을 이후에 언어화하는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식을 습득하고 확장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읽기/듣기와 쓰기, 학습/연구와 발표를 상호 독립적인 활동인 것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습관을 버려야한다. 학문적 과정에는 글쓰기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대학에서 진로를 결정하고 대학생의 역할을 하려면 자신의 공부에서 글쓰기가 가지는 의미를 알아야 하며, 글쓰기를 생활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한다

학술적 글쓰기에 대한 공포를 줄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글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글쓰기가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쓰기를 어렵다고 인지하는 경우 글쓰기를 잘 하지 못했을 때 '나는 원래 재능이 없다'는 결론을 얻으며 실망하게 되겠지만, 글쓰기를 종합적으로 구성하는 부분요소들을 인지한다면 부족한 점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보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가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학습자로 하여금 글쓰기 학습을 위한 시간을 스스로, 그리고 충분히 확보하도록 이끌 것이다. (언제나 갖고 다니면서 기록할 수 있는 공책이나 작은 필기장을 준비하여 글쓰기 일지를 쓸 것을 권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데에 있어서 무제한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너무 촉박하게 글을 쓰는 것 만큼이나 생산적이지 않은데, 어느정도 기간을 정해놓아야만 완벽주의의 늪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2,000 단어 혹은 A5 페이지 분량의 글을 쓰는 데에는 일주일을 계획하는 것이 적당하며, 그 기간 동안에는 글쓰기에 가장 우선순위를 부여해야한다. 때로는 희생이 필요할 수도 있다. 제한된 시간을 최대한 내실있게 운용하면서 글쓰기 단계 전반에 알맞은 시간을 배분할 수 있을 때 전체적으로 완성도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언어적 표현 못지않게 시간관리 또한 글쓰기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글쓰기는 단순히 지식을 언어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일련의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글쓰기가 주는 공포와 스트레스는 단순히 '할 말을 잘 쓰지 못하는 데'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의 심리적 압박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 고려해야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능숙하게 고려하는 것이 어렵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이유로 학술적 글쓰기의 필수적 구성 성분이자 심지어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글쓰기를 멈추거나 미루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심리적 압박을 완화할 수 있는 전략들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가령 글쓰기가 막혔을 때 상담이나 조언을 구할 교수나 선배, 또래친구가 있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해서 부정적인 경험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