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면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책의 인상과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표지의 색상이 절제되어 있어도 면지의 색감이 뚜렷하면 전체적으로 짙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물도깨비 작가는 책의 앞뒤에 넣어지는 면지가 막을 열고 닫는 커튼과 같다고 말했다. 좋은 비유인 것 같다. 면지가 없는 책도 그 나름대로 의도가 있어서 면지를 넣지 않은 것이겠지만(아니면 비용적인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고), 면지가 있으면 커튼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그 내용물/작품의 무게감을 더 실어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커튼이 없으면 권위적인 인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면지는 보통 색지 면지를 베다로 프린트한 제물 면지보다 높게 쳐주지만, 안그라픽스에서 나온 <바우하우스>를 보니 제물면지도 내용과 관련있는 사진을 베다로 넣으면 책의 분위기와 배경을 환기하는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것 같다. 여러모로 이 출판사의 책 제작 센스는 압권이다. <한글 타이포그라피 안내서>는 회색의 심플한 단색 표지 안에 참외색 색지 면지가 들어 있어서 멋지다고 느꼈는데, 오늘 발견한 이 책 바우하우스도 정말 작품인 것 같다. 흑백 사진을 가득 채운 제물면지가 앞뒤로 열 장씩 들어 있는데, 책의 본문으로 들어가면 사진이 거의 없는 텍스트 위주의 책이지만, 전체적으로 이미지가 풍성한 책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마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파노라마로 배경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멋진 제물면지의 사용 사례인 것 같다.
한편,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도 표지를 열면 채도가 낮은 코발트색 색지가 두 장씩 나오고 약표제지가 등장한 다음에 서울을 내려다 본 사진이 베다로 꽉 채워져서 양쪽 가득 나오는데, 이것도 서울 개발의 역사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적으로 지리를 쫙 훑어보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확실히 책은 그냥 텍스트를 담고 있는 종이뭉치가 아니라 연극 같은 것이 펼쳐지는 무대인 것 같다. 책을 옆으로 넘긴다는 행위도 책에 시간성을 많이 부여해주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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