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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포경산업의 간략한 역사 - 11세기부터 상업적 포경 금지 조치까지

서서재 2022. 10. 19. 23:14

<세계 포경산업의 간략한 역사 - 11세기부터 상업적 포경 금지 조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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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한바랄 출판사의 번역가 서서재입니다. 이번에는 고래잡이와 포경산업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와보았습니다:) 이번에 울산에서 여느때와 같이 논란의 고래 축제가 열리기도 했고 남방큰돌고래 비봉이가 마침내 가두리 훈련장을 벗어나 바다로 돌아가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고래에 관해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어졌는데, 자료를 찾다보니 국제포경위원회를 둘러싼 포경 산업의 변천사를 통해 해양생물과 해양생태계를 더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제포경위원회는 고래를 ‘지속가능하게 잡자’는 목적으로 발족했지만 지금은 상당히 고래류 보호에 앞장서는 기구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 무엇인지 파헤치다 보면 ‘지속가능성’으로 시작한 개체수 관리가 해양 생물의 절대적인 보호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들 전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 수산물 소비의 지속가능성만을 목적으로 하는 MSC가 좀 더 적극적인 해양생물 보호기구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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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으로서의 고래잡이는 11세기에 바스크(Basques)인들이 북대서양긴수염고래를 사냥하여 판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더 이후에는 미국과 노르웨이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도 포경 산업이 확대되었다. 상업 포경의 주요 사냥감은 혹등고래와 향유고래였는데, 이 고래들은 램프를 밝히기 위한 기름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19세기가 되면 포경산업에 증기선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포경업자들은 속도가 빠른 대왕고래나 참고래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폭약을 탑재한 작살도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로써 더 정확하게(그리고 더 잔인하게) 고래를 사냥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폭탄을 만들기 위해 고래가 더욱 많이 사냥되었다. 이는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기 전까지 화약으로 가장 많이 쓰이던 물질인 나이트로 글리세린이 수염고래류의 기름에서 추출되었던 데서 빚어진 결과였다. 한편, 이 시기에 일본은 연안에서 혹등고래와 긴수염고래 등을 잡으며 고래사냥을 확대했다.

포경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고래의 개체수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고래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부각되기 시작했다. 고래는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나들며 이동한다는 점에서, 고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공조가 필수적이었다. 결국 1925년에 국제연맹은 고래가 남획되고 있다는 사실을 공인하고 포경 산업에 규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고래 보호에 관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1930년에 고래의 개체수와 어획량을 추적하기 위한 통계 기구를 설립하는 것으로 구체적인 첫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1년에 22개국의 서명으로 ‘국제 포경 규제 협약 The Conventino for the Regulation of Whaling’이 비준되었다. 하지만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주요 포경 국가들은 이 협약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해에 사냥 당한 고래의 수도 43,000마리에 이르렀다. 

고래류가 한 종씩 멸종에 가까워짐에 따라 국제사회는 조금 더 다급해졌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는 포경 산업에 최소한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점점 많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1948년이 되자 ‘국제포경규제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Regulation of Whaling; ICRW)’이 선포되었고, 이 협약의 의사 결정 기구로서 ‘국제포경위원회(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 IWC)’가 발족되었다. 국제포경위원회는 14개 회원국으로 시작했는데, 매년 회의를 열어 어획량 쿼터와 고래 사냥의 방법, 그리고 사냥 금지 구역을 정하기로 했다. 

국제포경위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발전하여 고래에 관한 다양한 의제를 논의하는 기구로 성장했다. 2022년을 기준으로 국제포경위원회의 회원국은 85개국에 이르는데, 이 중에는 과거에 고래잡이를 했던 국가들도 있지만, 한 번도 고래잡이를 하지 않았음에도 고래류 보호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가입한 국가들이 많다. 

국제포경위원회(IWC)는 처음 15년 동안은 포경 국가들의 클럽에 가까웠고, 고래 보호에 관한 실질적인 조치는 거의 하지 못했다. 어획량 제한은 너무 높게 설정되었으며, 규정 위반에 대한 제재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그마저도 쉽게 초과되었다. 

IWC의 이러한 관리 능력 부족은 고래류의 개체수 급감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1961/62년도 시즌에는 밍크고래가 66,000 마리나 사냥되면서 역대 최고 기록이 경신되기도 했다. 남극에 서식하는 고래들의 수도 급격하게 줄었고, 상업 포경이 시작되기 전에만 하더라도 남반구에 25만 마리나 존재하던 대왕고래는 2,300 마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고래를 잡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1961년에 설립된 세계자연기금(WWF)은 고래류를 시급히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국제적인 고래류 보호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고래 보호 쉼터 조성과 상업 포경의 전면 금지조치(모라토리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1972년에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UN Conference on the Human Environment)에서도 상업포경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래류 보호 조치가 긴급히 도입되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IWC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IWC는 ‘과학적 기준에 따른 지속가능한 어획량’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신규관리조치(NMP)을 제시하며 고래사냥을 멈추지 않고 단지 줄이기만 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IWC의 말대로 지속가능한 고래 어획량을 과학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종전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가 필요했다. 고래가 이미 바다에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데이터를 수집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고래의 개체수는 더욱 줄어들고 있었다. 결국 1979년에 IWC는 공장식 설비를 갖춘 포경선으로 고래를 잡는 행위를 전면 금지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여기서 밍크고래는 예외로 처리되었다). IWC는 인도양 전체를 고래 보호구역으로 지정했고, 이곳에서는 연구 목적의 비살상 고래 포획만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래 사냥 통계를 조작하고 허위 보고를 하는 사례가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1982년에 IWC에서는 모든 상업적 포경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모라토리엄이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결국 상업 포경 모라토리엄이라는 특단의 조치는 투표 결과 찬성 25표, 반대 7표, 기권 5표로 가결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일본과 노르웨이, 그리고 소련은 이러한 조치에 즉각 반발하며 자신들은 모라토리엄에서 예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일본은 1987/88년에 이러한 이의 제기를 철회했는데, 여기에는 불손한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다 — 옮긴이). 아이슬란드는 모라토리엄이 결정되었을 당시에 이의 제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1992년에 IWC를 탈퇴했다가, 2002년에 재가입하여 포경을 재개했다. 

1994년에는 여러 환경단체가 총력을 기울여 캠페인을 펼친 끝에 5천만 ㎢ 규모의 ‘남극해 고래 보호구역(Southern Ocean Whale Sanctuary)’이 조성되었다. 이 보호구역은 장기적으로 고래류의 개체수 회복을 위한 본거지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오로지 연구 목적의 비살상 방식으로만 고래를 포획할 수 있었다. 

<The history of whaling and the 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 
WWF, June 20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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