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번역 이야기

[번역 이야기] 02. 번역가는 피아니스트 II

서서재 2021. 7. 5. 11:19

제가 저번 글나눔에서 번역가를 피아니스트에 비유하는 정영목 번역가님의 글을 가져왔었는데, 이번주에도 비슷한 맥락에서 피아노 연주를 가지고 번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책상에 앉아 번역을 하실 때 음악을 들으시나요? 들으신다면 어떤 음악을 들으시는지 궁금하네요ㅎ

저는 번역 과제를 할 때 가끔 피아노 연주곡을 듣곤 하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번역과 피아노 연주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종이에 적힌 것을, 무언가를 두드리는 방식으로(아마 대부분 번역을 하실 때 키보드로 작업하시겠지요..?), 다른 소리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 번역과 피아노 연주는 비슷한 구석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 다 기술과 감을 모두 익혀야 좋은 작품을 빚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피아노 연주자들이 연주를 할 때 유념하는 것들을 번역을 할 때에도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번주 글나눔으로는 엉뚱하게도 음대 입시생이나 콩쿨 준비생들을 위한 피아노 레슨 영상을 가져와 봤습니다.

가끔은 활자에서 벗어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서 유튜브 영상을 골라봤는데, 자막을 옮겨 적어보니 어느때보다도 글이 많은 것 같네요..^^;

 

바쁘신 분들을 위해서 요약을 해드리자면, 이 레슨의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① 부분을 완벽하게 연주(=번역)하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전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나 분위기를 놓쳐선 안 된다.

② 그렇다고 부분을 대충대충 연주(=번역)해서도 안 된다. 부분은 부분 나름대로 철저하게 지켜야하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영상을 시청해보세요~

레슨 포인트에 따라 피아노 연주가 달라지는 것을 듣는 재미가 있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JXqJgd2XBA&t=1s

<입시 콩쿨 단골곡 베토벤 소나타 3번에 대해서 알려드립니다>

 

저는 오늘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던 베토벤 소나타를 가져와봤습니다. 베토벤 소나타 op.2의 3번 소나타를 가지고 와봤는데요, 이 곡은 (...) 지금도 콩쿨곡, 입시곡으로 많이 쓰입니다. 그만큼 아주 중요하고 또 까다로운 곡이 아닐 수 없는데요. 사실 베토벤이 이 곡을 처음 작곡할 때는 클레멘티나 훔멜과 같은 아주 기교가 발달한 피아니스트들이 등장하는 시기였어요. 그래서 베토벤도 '나도 그런 기교적으로 화려한 곡을 쓰고 싶다'는 의지가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온 소나타이고, 전체적으로 굉장히 규모도 크지만 기교적으로 까다롭고 어려운 passage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곡을 칠 때 여러가지 어려움들, 힘든 점들이 많이 있는데, 저는 이 중에서 여러분들이,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들을 먼저 한 번 알려드리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맨날 이 곡을 한 번 연주하는 것을 듣고 항상 하는 질문이 있어요. 연주가 끝나고 악보를 덮고서 이 곡의 맨 앞에 빠르기말 자리에 뭐라고 써있는지 아냐고 항상 물어봐요그러면 아주 많은 학생들이 대답을 못합니다. 뭐라고 써져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나머지 중에서 몇몇 학생들은 그 일부분만을 기억해요. 그러니까 Allegro 정도? 그 정도로 기억을 하는데, 지금 이 3번 소나타의 맨 앞에는 Allegro con brio라는 지시어가 쓰여져 있습니다. (...) 즐겁고, 기쁘고, 생기있고, 활기있게 치는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이 곡을 열심히 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가장 중요한, 어떤 분위기를 내야 하는지를 잊어버려요. 그래서 이 곡을 굉장히 심각하고 무겁게 쳐요. 이런 식으로요. (연주) (...) 학생들 중에서 이 곡의 모든 음을 다 맞게 치고 쓰여져 있는 모든 악상 기호를 다 지켰는데도 이 곡의 분위기를 몰랐기 때문에 굉장히 심각하고 무겁게 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곡이든지 항상 앞에 써 있는 지시어가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꼭 기억해두셔야 돼요.

 

그 다음에 또 학생들이 많이 하는 실수는 무엇이냐면, 박자표를 보지 않는 것이에요. '무슨 당연한 말씀을 이렇게 하나' 하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이 곡은 4/4 박자에요. 4/4는 '강약중강약'으로 알고 있잖아요. 이거는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우리가 다 배우는 거죠. 그래서 이 '강약중강약'이 이 곡 전체에 걸쳐서 흘러야 돼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약중강약이라고 해서 첫 박은 크게 치고 두 번째 박은 작게 치고 세 번째 박은 중간으로 치고 네 번째 박은 약하게 치느냐, 뭐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이런건 어떤 식으로 생각하시면 편하시냐면, 마치 우리 몸에서 흐르는 맥박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 몸에서 맥박이 계속 흐르고 있잖아요. 하지만 그게 남한테 막 들리지는 않죠. 하지만 일정하게 내 몸 속에서 뛰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만약에 이 맥박이 굉장히 빨랐다가 굉장히 느렸다가 하면 어떻게 되죠? 부정맥이라는 커다란 병에 걸리게 되는 거예요. 음악도 똑같아요. 이 맥박이 다른 사람 귀에 들릴 정도로 강조될 필요는 없지만 이것이 아주 일정하게 흐르고 있어야 이 곡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곡이 되는 거예요. (...) 많은 학생들이 "어떻게 쳤냐"고 물어보면 항상 "뭘 좀 빼먹었어요, 뭘 좀 틀렸어요" 이런 말을 잘 하는데, 곡을 일정한 비트를 가지고 맥박의 흐름에 맞게 쳤는가에 대해서는 잘 생각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제가 학생들이 많이 하는 실수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중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보를 잘 보셔야 해요. 제가 아까부터 굉장히 당연한 얘기만 하고 있는데, 그 당연한 얘기를 학생들이 굉장히 많이 놓치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베토벤은 굉장한 완벽주의자였어요. 그 사람의 Autograph, 그러니까 자필 악보를 보면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만큼 수정이 많이 되어있다고 해요. 그러니까 작은 이음줄 하나를 이 음까지 할 건지, 바로 그 전 음까지 할 건지, 이런 거 하나하나도 굉장한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라는 이야기이죠. 그런데 많은 학생들은 음정박자는 정확하게 지키는데 음정박자를 제외한 이음줄이라든지 스타카토 표시, 스포르잔도 이런 것들은 그냥 대충대충 넘기곤 해요. (...) 조그마한 악센트 표시 하나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악보를 아주 자세히 보시는 것이 베토벤을 성공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팁입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