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오늘의 번역 일기

[번역 일기] 20210713(1) 필사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서서재 2021. 7. 13. 09:44

얼마 전 샘플 번역에 참여했다가 떨어졌습니다. 검토서를 작성하면서 애정을 적지 않게 쏟은 책이었고, 번역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떨어졌더라구요. 어떤 점에서 제 번역이 부족했을까 궁금하던 차에 감사하게도 출판사에서 피드백을 보내주셨습니다. "철학 에세이 보다는 조금 더 무거운 사회과학 서적 느낌이 난다"고 하시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아차'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번역을 할 때 청소년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표현을 간결하게 해보자는 생각으로 번역을 하다가 도무지 어색해서 제 원래 문체로 초벌 번역을 해놓고 나중에 표현을 다듬자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다가 마감에 쫓기고 제가 살뜰하게 빚어낸 표현들을 너무나 아끼게 된 나머지 문체를 크게 고치지 않고 그대로 제출했죠. 결국 이번 샘플 번역은 문체가 맞지 않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무겁고 현학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카데미에서 심화반 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께 여러 번 지적받은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첨삭 받은 번역문 말미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말을 어렵게 하시네요"라고 써있던 것을 기억해요. 그러고보니 그 번역문에서 저는 '역사를 추동推動하는 힘'이라거나 '야사野史' 같은 한자어를 많이 썼더라구요. 아니, 나중에 보니 그랬더라는 것이기보다는 번역을 하면서 일부러 쓴 것에 가까웠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그게 가장 적확한 번역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돌이켜보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괜히 현학적이고 올드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자어를 쓸 때마다 선생님이 빨간 글씨로 "어려운 한자어 쓰지 마세요!"라고 코멘트를 달아주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문체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것은 비단 저만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김고명 번역가도 같은 문제를 겪으셨더라구요. 하지만 이 문제를 잘 해결하신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초기에 많이 지적받은 부분이 문체였어요. 문장이 너무 건조하고 딱딱하게 읽힌다는 말을 편집자와 대학원 교수님에게 자주 들었어요. 그건 아무래도 제 성격이 원래 좀 건조한 편이고 남자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남자가 여자보다 딱딱한 문장을 구사해요. 하지만 번역가라면 양쪽의 문체를 다 쓸 수 있어야죠. 그래서 그때 제가 들었던 조언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한자어를 줄여보라는 것. 한자어는 순우리말보다 딱딱한 느낌이 강합니다. 그래서 한자어를 의도적으로 줄였어요. 다른 하나는 한국 소설을 많이 읽어보라는 것이었어요. 언어의 귀재들이 어떻게 언어를 요리하는지 맛보라는 거였죠. 그래서 한국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필사를 했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침이 고인다》를 주로 필사했어요. 남성적인 느낌을 완화하기 위해 일부러 여성 작가의 책을 선택한 거죠. 그러고부터는 문장이 딱딱하다는 지적을 들은 적이 없어요. (...) 그게 습관으로 자리잡아 지금도 매일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원서와 비슷한 국내 작가의 책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김고명, 『어느 젊은 번역가의 생존 습관』, p.p. 89~91)

 

저도 책을 읽다가 기억해두고 싶은 부분을 발견하면 노트북으로 필사하는 게 취미인데, 다른 작가/번역가의 문체를 익히기 위해 필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해본 것 같습니다. 정영목 번역가의 말대로 번역가는 여러 가지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자기 목소리로 돌아올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데, 여러 문체를 흉내낼 수 있는 능력은 번역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꼭 익혀야 하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부터 문체 필사하기를 조금씩 실천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대중적이고 가벼운, 에세이 스타일의 글들부터 익히도록 노력해봐야겠어요. 그리고 제가 여태까지 친해지지 못했던 문학 작품들과도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봐야겠습니다. 소설이나 시도 필사해봐야겠어요. 이렇게 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논문 같이 건조한 문체에서 벗어나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자, 이번에도 화이팅!

 


<오늘의 필사>

이지수, 『아무튼, 하루키』(#에세이 #여성작가)

p. 37

어쩌다 그 애를 좋아하게 됐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애는 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고, 일본인이었다. 우리는 일본인과 외국인이 교류하는 일본 대학의 학내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주로 서양인들이 영어로 와글와글 떠들던 그 자리에서 짙은 보라색 후드티를 입고 장승처럼 벽에 붙어 서 있던 그 애에게 내가 먼저 다가갔다. 나는 두 번째 일본 유학이었던 터라 일본어가 영어보다 훨씬 편했지만, 그 애가 더듬더듬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 사실을 잠시 숨겨봤다. 실은 내가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아는데 말이야, 하고 나중에 고백했을 때 놀라는 모습은 더 귀여웠다. 우리는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다음 날 새벽 3시에 그 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금 만날 수 있느냐는 대담한 메시지였다. 대체 무슨 시간 감각인가 불쾌해야 하는데 마음은 멋대로 설레었다. 당장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래보고 싶어서 다음 날 저녁으로 만남을 미뤘다. 내가 좋아하는 가게에서 저녁을 먹고 그 애가 자주 가는 술집에서 새벽까지 맥주를 마셨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학교 안을 산책했고 체육관 옆 벚나무 아래의 벤치에 오랫동안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