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나/오늘의 번역 일기

[번역 일기] 20220605 바다 환경 전문 출판사를 세우고 환경운동을 하면서 내게 생긴 변화

서서재 2022. 6. 13. 18:31

예전에 저는 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사상이 부족해서, 혹은 모두를 설득시킬 만한 사상이 완성돼 있지 않아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세계적인 사상을 낳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매일매일 저를 채찍질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길은 걸을수록 저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책을 계속 읽는데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만 더 눈에 들어오고, 외국어를 두 개나 할 수 있게 됐는데도 할 수 있게 된 말보다 못 하는 말 때문에 답답해했죠.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기쁘기보다 경쟁심이 먼저 들었고, 그러면서 모순적이게도 저와 뜻이 맞는 사람이 없다며 지독하게 외로워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문제가 제가 공부를 더 하고 더 높은 학위를 따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세계적인 사상가가 되어야만 지금 가진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그 해결책이란 너무나도 먼 미래에나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서, 아니 달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기어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 진학을 단념해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학자가 되기를 고집하던 저에겐 전례없는 좌절감이 찾아와도 좋을 상황이었죠. 다른 친구들은 벌써 석사를 따고, 유학을 가고, 논문을 쓰고 있는데, 저는 뒤쳐지다 못해 길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맞지 않는 신발과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벗어던진 것처럼 조금씩 몸이 가벼워졌던 것이죠. 그렇게 에너지가 조금씩 차 오르면서 우울증 치료를 시작할 수 있게 됐고, 매일매일 번역 공부를 조금씩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번역 공부는 할수록 재미가 있었습니다. 적성에도 너무 잘 맞아서 '왜 이런 길을 이제야 알게 됐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죠. 전문 번역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1년 교육과정의 번역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공부를 더 했습니다.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나서는 리뷰 작업을 1년 더 했죠. 외국 서적을 한국에 들여오기 전에 책을 읽어보고 출판사에 발췌 번역과 검토 의견을 전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열흘 노동에 15만원 남짓한 돈을 받는 허드렛일이었지만 매번 양질의 리뷰서를 납품하기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나중에는 제게만 리뷰를 맡기는 출판사도 생겨났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지독하게 정치철학 책만 편식하던 저였지만, 열일곱 권의 외서를 리뷰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게 됐습니다. 자서전, 체육의 역사, 생물학, 범죄학, 식물학, 생명공학 분야의 책들을 접해볼 수 있었죠.

그중에서도 제일 재미있었던 건 환경 도서들이었습니다. 국립공원만으로는 생태계 보존과 회복이 어려우니 도시의 유휴지와 주택가 정원에 조그마한 자연을 조성해 야생 생물들이 징검다리처럼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책도 있었고, 친환경 기술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국가의 대대적인 지원과 구입이 필요하므로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녹색 시민이 되자는 책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와 지혜가 너무 많은 책들이었고,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너무나 컸습니다. 리뷰서 마지막에는 ‘강력하게 출간을 권합니다’라는 말을 꼭 써붙였죠.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꼭 출간되기를 바랬던 환경 서적들은 출간 결정이 나지 못했습니다. 왜였을까요.. 그때 저는 외서 리뷰 작업에 회의감을 느끼면서 ‘편집자들 참 보는 눈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외서를 발굴해서 기획서를 쓴 다음 출판사에 투고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죠. 국내에 팜유의 문제를 다룬 책이 한 권도 없다시피 한 것을 보고 팜유를 다루는 외서를 찾아냈습니다. 전자책으로 구입해서 내용을 읽어봤는데, 이 책은 생각보다 조금 중구난방으로 쓰여서 다른 책을 알아보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물도깨비 작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인스타 피드가 바다 사진으로 가득한, 바다로 흠뻑 젖어 있는 사람이었죠. 저는 예쁜 카페나 열심히 찾아다닐 줄 알았지, 자연과는, 특히 바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이 사람이 예전에 올린 포스트까지 뒤적이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홈런볼 봉투에 담배꽁초와 해변 쓰레기를 가득 주워 모은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사진에 달린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죠.

"플로깅하거나 해양 정화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쓰레기 세부분리수거 가이드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가 무엇인지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아마존을 뒤져서 비치코밍, 해변 청소, 플로깅 등에 관한 책들을 찾아냈죠. 그 중에는 <Beachcomber’s Guide to Marine Debris>라는 책도 있었습니다. 해변 쓰레기를 종류별로 기록하고 설명을 달아놓은 책이었는데, 폐어구를 다루는 챕터가 있길래 이 부분부터 번역을 시작해보았습니다.

처음에 저희는 이 책을 가지고 기획서를 써서 기성 출판사에 투고해보려고 했습니다. 취준생이 직장을 구하는 것처럼 100 군데에 기획서를 돌리면 언젠가는 채택될 거라고 기대했죠.

하지만 역시 너무 막연했습니다. 그렇게 기성 출판사에 투고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동안 저희는 계속 바다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화의 주제는 해변의 쓰레기 문제에서 미세 플라스틱 문제, 기후위기와 바다 산성화, 갯녹음 현상, 해양 생물의 동물권 문제와 비거니즘, 원양 어업과 바다 생태계 파괴, 수족관 감금 돌고래 문제 등으로 점점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바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저희는 눈 딱 감고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직접 출판사를 세우자.”

그냥 출판사도 아니고 환경 출판사를, 많고 많은 환경 문제 중에서도 바다 환경문제만 다루겠다는 출판사의 시작이었죠.

마이너한 분야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독자들의 선택을 받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바다만 생각하면 됐으니까요. '바다를 구할 수 있는 책, 바다를 가득 담은 책, 육지에 사느라 바다를 잊어버린 사람들이 바다로 돌아올 수 있는 책을 내자’고 생각했습니다.

제 일상과 인생이 크게 바뀌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철학책만 찾아 읽던 저는 환경에 관한 책을 하나 둘씩 사서 읽기 시작했고, 제주에 가서 해변 청소를 처음 해보며 바다 쓰레기 문제의 심각성을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씨스피라시>를 비롯한 바다 환경문제 관련 다큐들을 찾아보고, ‘물살이’라는 표현을 접하면서 어류 동물을 보는 시선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죠. 틈나는 대로 해변 청소를 더 자주 하러 다니며 바다 관련 강의나 포럼을 찾아다니게 됐습니다. 그리고 바다 환경이나 해양 생물의 동물권과 관련된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환경문제에 관한 책과 글을 더 많이 읽을수록 새로운 내용을 알고 싶어졌는데, 신기하게 해변 쓰레기의 경우에도 쓰레기를 주울수록 더 많이 줍고 싶어졌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명색이 바다 환경 출판사를 하는 만큼 한 달에 최소한 한 번은 해변 청소를 하러 가자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쉬러 놀러간 여행지에서도 쓰레기를 줍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이 되어버렸죠.. 의무감보다는 재미와 보람 덕분에 바다에 더 자주 가게 되었고, 해변에서 함께 쓰레기를 주우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는 게 제게 너무 즐겁고 기쁜 일이 되었습니다.

학자가 되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시절에는 너무 불안하고 외롭기만 했는데, 지금은 하루하루 무척 충만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환경 관련 활동을 시작한 것이 정말 제게 큰 전기를 마련해준 것 같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부터는 저보다 더 멋진 사람을 만나면 경쟁심보다 배우고 싶고 친해지고 싶고 닮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고, 제가 학식이 짧고 읽은 책이 적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괴감보다 매일매일 조금은 무언가 좋은 일을 하고 있고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먼저 듭니다.

그리고 정치철학을 공부하던 때와는 생각이 조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건 사상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구요. 제가 몰랐던 곳에서 엄청난 실천을 하면서 세상을 바꿔온 사람들이 있었고, 중요한 것은 제가 제 몫의 실천을 더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조금은 덜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실천하자고 다짐합니다.

6월 5일이 환경을 기념하기 위해 환경 관련 활동이 제게 남긴 변화를 쓰려고 하다 보니 글이 길어졌네요.. 아직 부족한 점과 위선적인 점이 많은 저이지만, 이 글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조금씩 더 실천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제가 경험한 환경 운동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큰 기쁨과 해방감을 주는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실천을 더하다가 언젠가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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